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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서 내려 강의실로 향하는 동안 나는 이유 없이 뒤통수가 근질거렸다.
시간을 들여 영어를 듣고 있었지만, 솔직히 내용이 기억나지는 않았다. 그사이 날은 더 우중충해져 있었고, 때문인지 덜 마른 티셔츠를 걸친 것처럼 기분도 축축해지고 있었다.
등산로 수준의 경사로를 따라 학교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강의실에 도착했다. 아무도 없었다. 칠판에는 휴강이라는 글자가 뻔뻔하게 쓰여 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영어를 듣느라 확인하지 않았던 많은 알림 속 휴강 공지 메시지를 볼 수 있었다.
이런 식의 배려 없음으로 댓글이 많은 교수였다. 당일, 혹은 수업 직전의 갑작스런 휴강으로 수많은 댓글을 보유한 수업이었다. 하필 전공 필수 과목이라는 게, 전공과목 교수라는 게 나는 상당히 짜증스러웠다.
건물을 나서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웹툰이나 드라마에서 흔히 이어지는 익숙한 설정 같아 놀랍지도 않았지만 짜증은 배가 됐다.
휴...
겨울이었으면 허옇게 드러났을 긴 한숨을 내쉬고 나는 편의점이 있는 건물로 걸음을 빨리했다. 이왕 학교 온 김에 도서관이라도 갈까 잠시 망설였지만, 우산을 계산한 발걸음은 미련 없이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산발적으로 흩뿌릴 거라는 표현과 달리 비는 폭우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빗나간 일기예보를 보기만 한 나도 이렇게 어이가 없는데 방송에 나와 거짓이 된 사실을 전했던 기상 캐스터는 얼마나 쪽팔릴까. 나는 빗물과 함께 경사로를 흘러내리며 별생각이 다 들었다.
평소에도 복잡한 학교 앞 도로는 사람 수만큼 불어난 우산 덕분에 더 많이 어수선해져 있었다. 저 틈에서 버스를 잡아탈 생각을 하니 다다르기도 전에 벌써 진이 빠졌다.
정류장까지의 거리 중간 즈음, 폐지를 수레에 싣고 가는 노인이 보였다. 폐지를 덜 젖게 하려면 더 빨리 움직여야겠지만 복잡한 도로에서 노인의 움직임은 답답하리만치 더뎠다. 폐지가 빗물을 흠뻑 머금었을 테니 수레는 두 배 정도 더 무거워졌을 터였다. 불어난 도로의 우산 때문이 아니더라도 느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였다.
앞서 걷고 있던 한 여학생이 종종거리며 달려가 노인에게 우산을 씌어주고 뭐라 얘기했다. 야구모자를 쓰고 있던 여학생은 노인의 만류에도 우산을 넘기고 자신이 수레를 끌기 시작했다. 우산을 받아 든 노인은 어쩔 줄 몰라하며 어정쩡하게 수레 뒤를 따랐다.
그리고.
마치 편집이 잘못된 것 같았다. 혹은 방금 꿈에서 깬 것 같았다. 어느 새인지 기억나지 않는 시간이 사라졌고 생소한 장면이 이어졌다.
시야에 보인 건 수레를 끌고 있는, 이빨로 자주 물어뜯어 가장자리가 고르지 못한 내 엄지손톱이었다. 나는 수 초 가량 현실을 파악하기 위해 애써야 했고, 살면서 여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걸 자각했다.
나는 빗속에서 수레를 끌고 있었다.
내 것이 아닌 일을, 아마도, 스스로 나서서 하고 있었다.
수레를 잡은 손 아래로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 발이 보였다. 나의 발은 마치, 복잡하고 비까지 오는 도로에서 고민만 하고 서 있을 수는 없다는 걸 깨닫고 스스로 움직이는 생물 같았다. 혼란스러웠던 그날 그 시각 나의 발은 알 아 서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옆을 보니 여학생이 폐지 위로 우산을 든 채 종종종 발을 놀리고 있었다. 불과 몇 분, 아니 몇 초 전에 본 야구모자 여학생이었다. 그녀의 반대쪽에는 편의점에서 산 내 우산을 손에 든 노인이 있었다. 노인은 미안하다 고맙다를 지속적으로 반복하며 우산을 내 머리 위로, 또 폐지 위로 번갈아 씌어주고 있었다.
거침없는 나의 발걸음 때문인지 정신없던 도로 위 우산들은 홍해가 갈리듯 스멀스멀 움직이며 길을 터 주었다.
고작 몇 분. 아니 그보다 더 짧았을 수도 있었다. 기껏해야 그 정도의 시간이었다.
전염은 그렇게 나도 모르는 사이 완료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