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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나는 평소처럼 공동현관을 나섰다.
어제 내린 비 때문인지 도로는 깔끔한 물청소를 마친 욕실 바닥 같았다. 타일을 깐 것도 아니건만 반짝반짝 빛이 났다. 하늘엔 구름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사이로 보이는 파란색 덕분에 제법 상 쾌 한 기분이었다.
나는 문득 ‘상쾌하다’라는 단어를 문자로 써봤거나 음성으로 말해 본 적이 있던가에 대해 생각했다. 떠오르는 기억이 없었다.
그리고 짐짓 놀랐다. 어떤 방식으로 던 한 번도 그 단어를 써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그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자신도 생소했다. 평소와 같은 듯하지만 미세하게 다른 날이었다.
정류장의 버스는 막 떠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백미러로 나를 발견한 기사님이 기다려준 덕에 무사히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성대를 통해 입으로 뱉어진 나의 음성이 어색하게 고막에 닿았다. 생소한 나를 유난히 자꾸 마주하는 날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감염 같은 건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오늘도 빈자리는 많았다. 나는 일단 눈에 띈 자리에 앉았다. 천천히 버스를 움직이던 기사는 손님의 착석을 백미러로 확인한 후 속력을 올리기 시작했다. 어제처럼 앉혀졌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렇게 자의로 앉은자리는 어처구니없게도 어제와 같은 곳이었다.
생각해 보니 나는 그 자리를 자주 선택했다. 버스가 출발하는 바람에 앉 혀 졌 다 고 생각했지만 귀차니즘에 빠진 내가 자주 습관처럼 앉던 자리였다. 버스 안 그 누구도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나는 괜히 민망했고 그래서 헛기침이 나왔다.
나는 평소처럼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오른편의 출입문을 쳐다보았다. 나 같은 젊은이라면 열린 문으로 일 초 만에 튀어 내릴 수도 있는 거리였다. 근처 자리에 왜 그리 어르신이 많은지, 왜 집착하시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실은 나도 같은 이유로 그곳을 선호했던 거니까.
생각해 보면 그 이유는 노인들 당신들만을 위한 건 아닐지도 몰랐다. 빠릿빠릿하지 못한 당신들 다리 상태를 잘 알기에 버스 기사와 다른 승객들을 위한 배려의 선택일 수도 있었다. 노인들의 이기라고 생각했지만 내로남불이었고 근거 없는 선입견이었다는데 생각이 닿았다.
뒤쪽 빈자리로 옮겨야겠다고 마음먹는 사이 버스는 다음 정류장 도착했고 어제 그 할머니가 버스에 올랐다. 나는 어제처럼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덕분에 굼뜨지 않고 계단을 오르려 애쓰는 할머니의 앙다문 입술을 볼 수 있었다.
몸이 또, 스스로 움직였다. 마치 스프링 위에 앉아있던 것처럼 나는 튕기듯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뇌에서 지령이 떨어지기 전에 엉덩이가 알아서 자리를 박찬 듯했다. 할머니는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 비어있던 내 앞자리에 착석했다. 자리를 양보하겠다던 엉덩이는 겸연쩍게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고 낯선 나에게 놀란 나는 창밖을 보며 처음 보는 풍경인 양 신기해했다.
나는 창문에 비친 모습을 보고서야 이어폰이 제자리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매일 설정값이 입력된 기계처럼 집을 나설 때마다 어김없이 이어폰을 착용해 왔다. 아침에 느낀 다름은 있어야 할 곳에 꽂혀있지 않은 이어폰 때문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주머니에서 L을 꺼내 왼쪽 귀에 꽂고 핸드폰을 켜 블루투스를 연결하고 영어 리스닝을 틀었다. 그리고 이어 R을 착용하려는데, 앞자리 할머니가 뒤돌아 나를 향했다.
오늘도 공부 열심히 하네.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이 미소와 함께 더 자글거렸다. 할머니는 마치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 백 팩 위에 놓인 내 한 손에 뭔가를 내려놓았다. 구하기 힘들다는 밤양개이었다.
노래 때문에 존재를 알고 있는 상품이었다. 노래로만 들어봤지 먹어본 적도, 먹어보려 한 적도 없는 음식이었다. 양갱이 어떤 음식인지도 몰랐고 그러므로 밤이 들어갔을 법한 밤양갱 역시 처음 보는 것이었다. 나는 괜찮다고 사양했다.
최신 유행하는 거랴. 살래도 못 사.
할머니는 자신의 센스에 스스로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돌아앉았다. 내 입에서는 감사합니다 라는 말이 나왔고 이어 돌아앉은 할머니에게 꾸벅 고개까지 숙였다. 할머니는 알겠다는 듯 시크하게 오른손을 들었다 내렸다.
얼떨떨하고 어정쩡하게 앉아있던 나는 시크한 할머니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그 뒤로 보이는 작은 모니터 화면에 시선이 닿았다. 버스에 티브이 화면이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걸 쳐다보는 건 처음이었다. 항상 영어공부에 열심히였으니까.
쉽고 간편하게 거품 염색을 할 수 있다는 헤어 염색약 광고가 끝나고 지역 뉴스가 나왔다. 광고만 나오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다양한 콘텐츠가 있는 모양이었다. 기자인 듯 보이는 남자는 낯익은 거리에서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그의 말은 자막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코로나 이후 듣보잡 병균들이 활개를 치는 가운데 최근 강력한 전염력을 가진 신종 전염병이 번지고 있습니다. 전염 경로로 밝은 미소나 인사, 진심 어린 걱정의 말과 도움 등으로 밝혀진 배려 바이러스라고 하는데요.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한 학생을 만나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00대 학생입니다. 저는 제 전염 경로를 정확히 기억하는데요. 어제 갑자기 비가 쏟아졌을 때였어요. 이 도로가 엄청 복잡했는데 그 와중에 힘겹게 폐지를 끌고 가시는 노인분이 계셨거든요. 비 때문에 훨씬 더 힘들어 보였습니다. 그때 한 남학생이 그분께 우산을 건네고 대신 수레를 끌고 가는 거예요. 본인은 비에 다 젖으면서요. 그 모습을 보다 저도 모르게 그분의 바이러스에 전염됐고, 저도 모르게 그분과 함께 할머니를 도와드렸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좋은 바이러스를 전염시켜 주신 그분께 감사를 전하고 싶네요.”
야구모자 여학생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기자에게 마이크를 건넨 후 화면에서 사라졌다.
기자는 말을 이었다.
“최근 배려 바이러스가 조용히 빠른 속도로 퍼지고 있습니다. 들으신 대로 짧은 접촉이나 수초 가량의 목격만으로도 전염이 가능하다는데요, 이 바이러스에 전염되면 시야가 밝아지고 불만이 감소하며 이타심과 측은지심이 상승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합니다. 덕분에 면역력도 향상한다고 하네요. 최근 자각하지 못한 채 많은 사람이 배려 바이러스에 전염되면서 다양한 사회적 수치들도 변화를 보이고 있습니다. 자살률이 세계 1위에서 89위로 하락한 반면, 행복지수는 73위에서 5위로 급상승했다고 하네요. 전 국민 모두에게 이 바이러스가 퍼지기를 바라며 오늘의 소식을 마치겠습니다.”
화면에는 다시 광고가 이어졌다.
나는 시선을 떨궈 백 팩 위에 놓인 손을 바라보았다. 왼손에는 아직 꽂지 못한 R 이어폰이, 오른손에는 구하기 힘들다는 밤양갱이 들려있었다.
생소하고 기이한 조합이라고 생각했다. 헌데 썩 잘 어울려 보인다고도 생각했다.
오늘 창밖의 하늘은 말도 못 하게 파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