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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은 Nov 10. 2019

공무원의 아내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13

최소한이 최대한이라는 진리

나는 주위에서 알뜰하다는 얘기를 많이 듣고 살았다. 지금도 그러하다. 공무원의 아내가 된 이후 이 알뜰함은 나의 필살기가 되었다.

검소한 생활습관은 친정으로부터 비롯됐다.

돌아가신 친정아버지는 어린 시절 유복한 생활을 하셨는데 한국전쟁 때  할아버지가 재산을 다두고 피난을 나오시는 바람에 전쟁이 끝난 뒤의 생활은 밥과 소금만 드셔야 될 정도로 궁핍해졌다 하셨다. 아버지는 그러한 삶에 한이 맺히셔서 꼭 써야 할 것을 제외하고는

'돈은 아끼는 것이 아니라

 쓰는 것'이라는 철학을 가지고 계셨다.


아무도 없는 방에 불이 켜져 있는 날엔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한 번은 온수보일러를 켜고 나중에 꺼야 되는데 깜박하고 안 껐다가 정말 많이 혼났다.

겨울은 항상 추운 듯 지냈다.

어느 날 옆집 아줌마가 마실을 오셨다가 깜짝 놀랐다. 우리 가족은 온 집안의 불을 모두 끄고 깜깜한 안방에 다 모여 티브이만 켜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야! 놀래라~

아니 오늘 등화관제훈련날이야?

불을 왜 다 끄고들 모여있어?"

아줌마가 방문을 살짝 열다 놀래서 하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난다.

장난을 성공적으로 친 아이들처럼 우리 형제들은 깔깔대고 웃었다. 

부모님은 최소한의 생활비를 제외한 모든 돈을 저축하셨다. 내가 초등학교 때쯤 동네 한 은행으로부터 저축왕 상장도 받으셨다. 동네에서는 우리 집을 알부자라고 불렀다. 우리 가족은 그 호칭의 무게를 견뎌야 할 만큼불편한 일상도 감당해야 했다. 아버지보다 더 어려운 삶을 살다 결혼하신 엄마의 생활력 또한 대단하셨다. 그런 부모님 밑에서 빡빡한 용돈을 받으며 투덜거리곤 했다. 하지만 그것이 생활력이라는 잔근육을 만들어주었고 정말 큰근육을 써야 할 시점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나는 속으로 항상'나는 결혼하면 부모님처럼 저렇게 살지는 않을 거야'했다. 사고 싶은 거 다사고 하고 싶은 거 다  거다 했다. 그러나 거의 삼십 년 가까이 부모님과 살면서 굳은살이  삶의 습관은 이미 자동 매뉴얼이 되었다.

어느 곳에 가더라도 '켜진 불도 다시 보자'가 되어 돌아다니며 불부터 끄곤 했다. 그리곤 친정아버지처럼'전기세는 누가 대신 내주나'하고 중얼거렸다.

나는 최소한의 것만 가지고 살았다.  지금 살고 있는 집에 놀러 왔던 친구들은 횅한 거실을 보고 "야! 여기 집이냐? 콘도냐?" 하며 놀렸다. 그 당시에는 미니멀리즘이라는 용어가 일반화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러고 보면 나는 이미 그때부터 미니멀리스트였던 거 같다.

집이 좁아 이사를 고민하는 친구들에게 나는

"평수 넓혀서 이사 갈 생각하지 말고  짐을 줄여봐. 20평대가 30평대로 변하는 기적을 맞이할 것이다. 믿습니까?" 하며 말씀을 전하기도 했다.^^

지금은 구비가 되었지만 나는 정수기, 식탁, 청소기, 김치냉장고를 꽤 오랜 기간 가지고 살지 않았다.

수돗물을 끓여먹었고, 밥상을 펴고 밥을 먹었다. 빗자루로 방을 쓸었고, 텅 빈 냉장고에는 김치통이 들어갈 자리가 충분했다. 별로 불편하지 않았다.

얼마 전 티브이에 나온 건축가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았다.

'최소한이 될 때 최대한을 누릴 수 있다'




최근의 생활에서 부모님과 살 때 이미 키워놓은 잔근육이 빛을 발하고 있다.

남편의 월급과 나의 벌이로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수입을 맞춘 후 살아보니 빡빡하긴 하지만 살만은 했다. 가끔은 하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을 못해 답답할 때도 있다. 그래도  쉴 만은 하다. 

누구에게나 기준은 있고 철학은 있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는

정답은 없고 현실만 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어떡하겠나? 잔근육에 힘 바짝 주고



일단 켜진 불부터 끄자^^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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