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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콩 Feb 21. 2017

킬리만자로의 노동자들

세네갈의 하얀뚜밥, 동아프리카를 여행하다.

 초반에 언급한 적 있듯이 내가 아프리카 드리밍을 꿈 꿨던 곳은 바로 탄자니아였다. 대학 2학년때쯤인가 기숙사 같은방 아프리카출신의 동생으로부터 들은 소소한 삶에 대해 이야기를 들으며 이런 저런 많은 꿈들을 꿨던 것 같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는 서아프리카로 왔고 서아프리카에서 나름의 삶을 살게 되었다. 익숙하지 않은 아프리카에 대해 많은 공유를 하고 싶어 글을 쓰기 시작했고 여전히도 많은 지인들이 서아프리카, 동아프리카로 나누는 나의 말에 낯설어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동아프리카에는 우리가 아프리카,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탄자니아, 케냐, 이티오피아, 우간다 등이 있고 서아프리카에는 모로코, 모리타니아, 세네갈, 말리 등이 있을 것 같다. 그렇게 꿈만 꾸던 동아프리카로 휴가를 떠나게 되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기에 킬리만자로 등반과 사파리, 빅토리아 폭포정도만 크게 잡고 떠났다. 휴가에 대해서는 사실 글을 쓸 생각이 별로 없었는데 나를 너무나 화나게 했던 사건이 있었고 이것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꼭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서문을 열어본다.

 

 나는 유독 마음이 여려지는 순간이 있다. 누군가는 동물에게, 누군가는 여성에게, 누군가는 노약자에게, 누군가에게는 어린아이에게 그런순간이 올 테다. 나에게는 바로 그 순간이 노동자이다. 가장 화가 나는 순간은 노동자가 고용주에게 쩔쩔매는 것이고 고용주가 노동자에게 횡포를 부리는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살면서 유독 한국에서는 노동자에 대한 대우가 좋지 않기 때문에 잦은 열폭을 했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회사생활을 할 때마다 을 주제에 갑질을 자주 했었던 기억이 난다. 아르바이트할 때도 그렇고, 언제나 “그래! 어디한번 짤라보렴 짤라봐라!”하는 마음으로 일을 했던 것 같다. 기득권을 가졌다는 이유로 횡포를 부리는것에 언제나 못마땅했던 나였다. 다행히도 마음맞는 회사에서 잘 근무할 수 있었고 이 먼 곳 세네갈을 때도 회사에서 붙잡아주는 상사를 만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돌아보니 그것은 엄청난 행운들이었고 부모님의 언제나 당당하고 떳떳하라는 교육철학 덕분이었다. 세상을 둘러보니 모두가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다시 한 번 울컥하고 속상하고 마음이 아팠다. 오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 또한 그 어떤 노동자들에 대한 나의 울부짖음임을 이야기 하고 싶다.


 이번 킬리만자로를 등반하며 나와 동행해준 지은이와 나를 위해 가이드 두 명, 요리사한명, 포터6명이 함께 해 주었다. 최정상 5800m를 향해 우리를 위해 9명이 붙은 것이다. 이들은 우리의 짐들과, 각종 식재료, 식기구, 가스, 침낭, 모든 것을 산위로 옮겨주는 포터들과 매 끼 우리의 에너지를 책임질 요리사, 그리고 우리의 컨디션체크와 길을 안내해줄 가이드였다. 나는 출발하기전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수십곳에 메일을 보냈다. 견적을 요청하는 글이었고 가난한 봉사단원이기에 네고를 바란다는 말도 아끼지 않았다. 사실 거의 저렴하게 해달라 땡깡쓰는 정도의 메일이었다. 답변이 온 수십곳들 중 몇곳을 추렸고 회신은 따로하지않았다. 직접 현장에서 네고를 하기 위함이었다. 사실 아프리카에 살다보면 거의 모든 삶이 네고를 해야한다. 외국인의 가격이 몇배에서 열배이상 뛸때도 있기 때문이다. 1년이 넘는시간을 아프리카에서 살며 네고에 대해 나름에 자신이 있었고 당당하게 찾아갔다. 여행중 들은바로는 킬리만자로를 위해 3500불을 썼다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도 들렸고 대부분 1200불에서 1500불정도를 많이 내는 편인것 같았다. 내가 계약 한 여행사에서는 애초에 메일에서 1100불로 답변이 왔고 사파리까지해서 1700불을 지불했다. 잘 예약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하산 이후에는 각각 가이드와, 요리사, 포터들에게 감사의 팁을 주어야 한다는 정보도 잊지 않았다. 나와 지은이는 헤드가이드에게 매일17불씩, 세컨가이드에게 15불씩, 요리사에게 10불씩, 포터들에게 매일6불씩의 팁을 지불했다. 총 400불에 가까운 팁을 지불했다. 등산하며, 하산하며 엄청난 무개의 짐을 이고 올라가는 포터들을 보며 우리가 지불한 총2200불중에 그들에게 얼마쯤 돌아가는걸까 매일 머릿속으로 계산해봤다. 입장료가 워낙 비싸다고 들었기 때문에 아무리 계산을해도 수지타산이 나오지 않았다.


이틀뒤쯤인가 다음날인가 그곳에서 사업을 하시는 한 한국인을 만날 수 있었다. 나는 그에게 포터가 받는 페이에 대해 물었더니 그는 단호하게도 한푼도 받지 못했을꺼란 답변을 들었다. 2200불중에 단 한푼도 돌아가는 돈이 없다는 사실에 너무나 황당하고 당황스러웠다. 감사의 마음으로 전달한 나의 ‘팁’이 그들에겐 일당이 되어버린것이다. 그 한인분의 말에 의하면 우리가 지불한 비용1100불 중에 700-800불정도가 공원 입장료로 빠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은비용으로 식재비, 각종 렌탈비 모든 것이 포함되기 때문에 그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있을꺼라고 생각 하냐는 질문을 되받았다.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포터들까지 급여를 받기 위해서는 못해도 1300-1400불 정도의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지불한다고 해서 또 그들에게 돌아가는 돈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저렴한 업체를 찾더라도 그들이 일한 것에대한 대가는 정당하게 지불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들에게 팁이라는 이름의 페이를 조금 더 지불 했을테다. 출발하기 전 인터넷에서 악덕업체라며 가이드, 포터, 요리사에게 횡포부리는 업체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얼핏 봤다.업체가 주지않는 급여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어떻게 할 수없는 부분이라 생각했고  내용 또한 자세하게 나와있지 않았고 그 글은 그저 저렴한 업체를 추천한다는 글뿐이었다. 아프리카 어디에나 있을법한 일이라며 나도 아무렇지 않게 그냥 넘어갔던 것 같다. 그 저렴한 업체는 또 사람들이 이렇게 저렴하다는 소식을 듣고 업체를 찾으니 가격을 후려쳐 노동자에게 돌아갈 비용을 줄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등산을 하다보면 수십명, 수백명의 포터들과 마주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하산할 때쯤엔 관절의 무리로 절뚝이며 하산하는 포터의 뒷모습또한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엄청난 무게의 짐을 머리에 이고서 끝까지 웃으면서 '잠보!'하고 외쳐주던 포터들이기에 더욱 화가 나고 말로 그 화남을 다 표현할 수 없는 것 같다.


사실 외국인상대로 바가지를 씌우기가 쉬운 관광사업은 때때로 밉지만 외국인상대로 일하면서 돈을 이토록 못 받는다는 사실에 더욱 화가 났다. 듣기론 그나마 동양인들이 팁을 후하게 주는 편이며 서양인들은 말도 안되는 팁을 주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 부분이 조금은 이해가 가는 것이 바로 명칭을 '팁'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페이를 다 지불하였고 그들의 서비스에 대한 감사한 마음에 팁을 제공하는 것인데, 가이드들과 포터, 요리사들이 당연하게 팁을 요구하니 그것에 대해서 문제가 일어나는것이 당연한것이다. 만약 그것이 그들의 급여라고 했더라면 다들 그렇게 짜게 굴었을까? 우리가 아는 팁의 정의와 그곳의 정의는 너무나도 확연하게 달랐다.

대부분의 글들을 보면 '업체'의 문제로 이야기들을 한다. 악덕 업체들이 노동자들에게 돈을 지불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럼 그 악덕 업체들은 대체 누가 만든걸까? 우리 모두 여행자들이 만든것이다. 자꾸만 저렴한것을 찾고 킬리만자로의 시장경쟁을 무너뜨려버린것이다. 킬리만자로의 관광사업은 분명 바뀌어야 한다. 물론 가격을 올리면 더할나위 없이 좋겠지만 모든 업체에서 함께 진행하지 않는다면 가격을 올린 업체측에서도 큰 타격이 있을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시스템으로는 결코 공생할 수가 없다. 특히나 먼저 팁이라는 명칭의 변경이 이루어져야 한다. 포터, 가이드, 요리사들은 그렇게 일주일을 일 하고나면 일주일은 쉬게 된다. 그리고 그 다음주에 일이 있어야 다시 등산을 할 수 있다. 한 달에 최대 두 번의 등산을 하는데 한 달에 두 번 모두 등산한다고 가정 하에 내가 지불한 팁의 기준 겨우 그들이 한달에 버는돈은 헤드가이드, 약 170불, 세컨가이드 150불, 요리사기준 100불, 포터기준 60불을 벌까말까 하는것이다. 매번 5800미터의 높이를 등산을 하면서 그들이 벌 수 있는 돈은 말도 안 되는 금액이었던 것이다. 물론 정부가 너무 많은 금액을 입장료로 갈취하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다. 하지만 우리마저 그들의 노동비를 갈취한다면 그들의 노동의 대가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정보들이 많이 퍼지고 퍼져야 팁이 저렴하다 비싸다로 싸우지 않을 테고 그것이 결코 팁이 아니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후기를 보면 어디가 비쌌다, 저렴했다 등의 후기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제발 그것이 결코 팁이 아니라 급여였다는 사실을 모든 여행자가 알았으면 좋겠다. 킬리만자로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그 얼마나 값진 일을 하고 있는지 여행자들도, 노동자들도 잘 알았으면 좋겠다.

탄자니아는 세네갈보다 GDP가 더 높다. 하지만 내가 본 탄자니아는 모순이 가득한 곳이었다. 없는것이 없었고 세네갈보다 물가가 조금 더 낮았다. 땅이 비옥해 농사를 지을 수 있는곳이 많아보였다. 우기가 오기전임에도 세상이 푸르렀다. 하지만 그 잠시 머무는 관광객인 내 눈에 세네갈에서 살았던 1년5개월이라는 시간보다 더 가난함도 바라볼 수 있었다. 몇 년전 읽었던 책에서 개도국의 아이들의 실상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그 때 그 책을 읽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이 후 개도국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었는데 가장 충격적인 내용이 고작 14살밖에 안된 아이들이 성매매를 하러 길에 나가고, 겨우 몇백원 벌기 위해 학교도 못가고 돌을 깨고 있는 아이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탄자니아에서 돌을 깨는 아이를 마주 했다. 정말 충격적이었다. 책에서 읽었을 때 마주했던 현실과 실제로 내 눈앞에 바라본 아이의 모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격이 다가왔다.  사실 개도국에 살다보면 가난함과 실상에 대해 까막눈이 되어져 가는 경우가 있다. 나의 한국에서 팍팍한 삶보다 조금은 가난하지만 이곳의 시간적, 마음적 여유로움에 반해 오히려 힐링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한다. 뿐만아니라 세네갈은 물가가 너무 비싸 외국인으로써의 삶을 살다보면 개도국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잊히기까지 한다. 이곳 삶에 대해 익숙해지며 무뎌지는 것이다. 이번 여행을 통해서 이 익숙함에서 다시 낯섦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또 구걸과 아동노동착취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던 여행이었다. 세네갈의 경우 종교적인 이유때문인지 대부분의 아이들이 구걸을 하러다니고 또 그 구걸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탄자니아에서는 구걸하는 사람을 겨우 세 명을 봤지만 아이의 노동착취가 충격으로 다가왔다. 세네갈에서는 꼬맹이들이 매번 돈 달라 오며는 일을 해! 라고 했던 내 모습에서 이중적인 사고를 바라볼 수 있었다. 교육단원으로 활동하며 아이들이 학교로 가 공부를 하고 기술을 습득하는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나는 킬리만자로 정상을 오르지 못했다. 고산병으로 찰리의 말에의하면 5350m쯤 올랐고 앞으로 500m를 더 올려야하는데 4시간정도를 더 가야한다고 했다. 마지막 쓸개즙을 토하며 더이상 올라갈수 없다고 포기하겠다고 했다. 그런 나를 보며 찰리는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하산을 했다. 내가 킬리만자로 정상에 오르지 못한 이유는 다시 그곳에 돌아가야하는 이유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훗날 몇년뒤 다시 찾아간다면 말도안되는 멍청한 팁이라는 명칭부터 바껴져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짧은시간이었지만 너무나 많은것을 공유한, 다시보고싶은 찰리.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길 바래요. 곧 다시만날 그날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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