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te Carmelo
오늘 우리가 찾은 곳은 Monte Carmelo(몬치 카르멜로)라는 매우 작은 소도시이다. 상파울로에 있을 때 알렉스의 친구 중 대학 강사인 친구가 Federal University of Uberlândia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나에게 나의 삶에 대해 강연을 좀 해줄 수 있느냐 물었었다. 사실 한국에서도 코이카를 비롯해 고등학교나 대학, 일반인 대상으로 조금 다른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었다. 몬치 카르멜로는 매우 작은 도시로 5만 명이 조금 안 되는 인구수를 가진 동네이다. 동네에 들어서자 예전에 내가 살던 께베메르가 떠오른다. 물론 아프리카의 시골동네랑 비교하자면 이곳은 도시에 해당할 정도로 매우 발전된 동네이다. 큰 슈퍼마켓도 있고 맛있는 레스토랑, 카페까지 있다.
우린 Uberaba에서 출발했고 꽤 성공적인 히치하이킹을 한 하루였다. 한국으로 치면 고속도로 휴게소에 해당하는 Graal에 친구가 내려줬고, 그 길로 10분도 채 되지 않아 Uberandia(우베란디아)로 향하는 차를 얻어 탈 수 있었다. 이번에 얻어 탄 커플은 젊은 시절 히치하이킹으로 여행을 참 많이 다녔다고 한다. 우리가 갈까 고민하고 있는 Mato Grosso do sul지역의 Must visit리스트를 만들어준다. 이것이 히치하이킹의 묘미랄까. 구글 맵에 그룹을 따로 만들어 visiting list와 been list를 분리하여 정리해 둔다. 우베란디아에서 몬치카르멜로로 향하는 길목에 내려준 우리는 다음차를 기다린다. 여럿 트럭들이 멈춰 섰고 마침 정말 몬치 카르멜로를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탈 수 있었다. 이 트럭기사는 사실 히치하이커들을 태워주지 않는데, 최근에 한국 유튜브에 빠지셨단다. 그래서 내 얼굴을 보고 한국인임을 알아보고 바로 차를 세웠단다. 그러더니 네 번의 결혼을 하셨는데, 자기가 조금만 더 젊었으면 한국인이랑 결혼을 해보고 싶다는 농담도 던진다.
2011년, 지방에서 올라온 나는 해외여행을 꿈도꿀 수 없었다. 학교 친구들이 방학만 되면 미국, 유럽 곳곳을 누비는 것을 보고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때 여러 공모전들을 도전하며 세계 여행을 꿈꿨고 KB카드에서 실시한 여행공모전에 지원해 미국여행을 할 수 있었다. 우리가 제시한 여행의 컨셉은 막걸리와 독도가 한국의 것이라는 것을 홍보하는 여행이었고, 한복을 입고 브로드웨이, 월스트릿을 누볐다. 그 당시만 해도 한국에 대해 들은 적은 있지만 어디에 있는지 조차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고 구구절절 설명을 해야 했다. 당시 뉴욕에 있던 L선배와 맥주를 마시며 한식의 세계화에 대해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한국의 힘이 너무 약해 한식이 중국이나 일본에 가려진 것이 너무 안타깝고 막걸리처럼 한국의 것이 다른 나라의 것인 것처럼 홍보되는 것이 너무 속상하단 이야기를 나눴다. 한식은 왜 일식이나 동남아, 중식처럼 유명해질 수 없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고, 당시 L선배는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는 말을 했었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 그 선배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몸소 실감한다. 특히 세계 곳곳을 누비다 보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한국 방문을 꿈꾸고 한식을 사랑하는지 이야기를 많이 한다. 오늘 이 시골 몬치카를멜로에서 학생 한 명도 K드라마 팬이라며 언젠가 한국에 꼭 방문하는 것이 꿈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이 트럭드라이버의 한국 유튜버에 빠진 걸 보면 정말 한식의 글로벌화는 무서운 속도로 퍼져나가고 있단 걸 피부로 느낄 수 있다.
몬치카르멜로는 정말 귀여운 시골동네이다. 모든 풍경이 그림 같고 하늘이 맑다. 앞서 Serra da Canastra 편에서 언급했듯 세하도 지역의 흙은 매우 붉다. 그 붉은 흙과 푸른 나무들, 파란 하늘이 어우러져 이쁜 그림을 만들어 낸다. 이 몬치카르멜로에서 꼭 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커피를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히치하이킹을 포함한 모든 브라질 친구들이 몬치카르멜로를 간다고 했을 때 몬치카르멜로의 커피를 극찬했다. 어떠했냐고 물어본다면, 정말 고소하고 프레쉬한 커피 향이 온몸을 깨우는 듯한 개운한 맛이었다. 혹시 몬치카를멜로를 지나가게 된다면, Grão d’Maria Cafeteria를 찾아가길 추천한다.
강연 신청을 한 친구들은 총 20명이 조금 넘었는데, 실제 참석한 친구들은 열명이 조금 넘었다. 영어를 잘하는 친구도 있었고 잘 못하지만 열심히 들어주는 친구들도 있었다. 가난한 지방러가 서울에 올라와 처음 해외여행을 하기 위해 공모전에 지원했던 일, 이후 여러 공모전을 통해 해외에 나간 일,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가 알렉스를 만난 일, 아프리카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히치하이킹을 하는 방법, 영어로 대화하는 방법을 향상한 방법, 장학금을 받으며 석사를 지원할 수 있는 방법 등 여러 가지 내 경험들을 나누었다. 시골에서 자란 친구들은 도시에서 자란 친구들보다 정보력, 경험 부분에서 많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친구들 중에서도 분명 눈을 반짝거리며 장학금이나 해외에서 일을 할 수 있다는 스스로의 잠재력 능력을 일깨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대학 2학년 때인가, 룸메이트로 배정받은 친구 중 탄자니아에서 온 친구가 있었다. 물론 한국인이었고 탄자니아에서 부모님께서 선교사로 활동하셔서 왔다 갔다 하는 친구였다. 당시 내 세상은 너무 좁았고 아프리카를 왔다 갔다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놀라웠다. 나와 비슷한 학년에, 한국인이 아프리카에서 자라왔고 가족들이 그곳에 있다면 나 또한 언젠가는 아프리카라는 땅을 밟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같은 게 있었던 것 같다. 그녀가 준 탄자니아 커피를 마실 때면 늘 아프리카를 가는 꿈을 꿨다. 그것이 나를 아프리카로 이끌 수 있었던 작은 불씨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