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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Oct 24. 2022

솔로, 혼밥, 그리고 칸막이

사물의 우연 : 다섯 번째 서랍 - 1인 라이프

솔로     

제니의 노래 덕분에 많은 솔로들이 위안을 받았다. 안 그래도 미디어에선 혼자 살아도 괜찮다고 위로하는 판이었는데 노래까지 거들어주니 고마울 따름. 그러나 이 솔로의 시대에 마케팅은 양극을 달린다. 빛이 나는 솔로가 있으면 우중충한 솔로가 있기 마련. 


물론 미디어 속 솔로들은 모두 빛이 난다. 통신회사 광고는 가상의 공간에서 함께 응원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편의점과 마트에선 1인분의 효율성이 미덕이 된 지 오래다. 삼겹살집도 혼자 가서 먹을 수 있는 시대가 됐다. 


그러나 우리가 이 미디어에 속지 말아야 할 건 미디어에 나오는 사람들, 특히 연예인들은 혼자인 적이 거의 없다는 것. 최소한 미디어에 노출되는 동안은 말이다. 밥을 같이 먹는 마흔 넘은 누나들도, 혼자 산다고 우기는 스타들도 진짜 혼자 사는 노량진과 신림동의 그들과 다르다. 매일매일 사람들과 어울려 놀고 만나기에 바쁘다. <나 혼자 산다>가 아니라 <바쁘게 산다>이고 <밥 블레스 유>가 아니라 <밥 블레스 어스>다.   


혼밥/혼행     

혼밥의 시대의 진실은 미디어에서 말하지 않는 진실이다. 김밥 천국이나 부산의 소울 푸드인 돼지 국밥 집에서 혼자 밥 먹는 사람들을 종종 볼 때가 있다. 필자의 집 근처는 소위 부산 남구의 맛 집들이 몰려 있다. 그 맛 집에도 혼밥 하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얼마 전 들렀던 광안리의 유명한 재첩국 집에서도 혼자 밥을 먹는 사람을 봤다. 


그건 <고독한 미식가>의 그것과 결이 다르다. 그건 진정 고독한 행위다. 오전의 시달림을 견뎌낸 외로운 육체에게 은밀한 포상을 주는 사치스러운 행위다. 그렇기 때문에 타자의 시선보다 주체의 만족이 우선되는 이기적 행위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 그래서 혼밥을 하나의 트렌드로 포장하려는 매스 미디어의 행위는 거추장스럽다. 사치스럽고 위선적이다. 그들은 애초에 그 혼밥의 속내를 들여다볼 의지도, 재주도 없다. 그들은 그저 식당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관광객처럼 그 혼밥의 현실을 스치고 갈 뿐이다.     


혼밥의 장치-칸막이 

일본에서 마주치는 혼밥의 장치는 간결하다. 

마주하는 벽과 타자로부터 격리시켜주는 양쪽의 차단막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 막의 길이가 좀 짧아서 옆 사람의 옆얼굴이라도 흘깃 볼 수 있지만 일본의 그것은 가차 없이 차단한다. 잘해야 어깨나 볼 수 있을까? 그 장치는 인테리어 요소가 아니라 고립을 완성시켜주는 기계적 장치다.


그 장치는 마치 고속도로 방음벽이나 미국 국경에 올리고 있는 장벽과 비슷하다. 아파트 단지와 자동차 전용 도로 사이에 세워진, 자동차의 소음을 실제적으로, 또는 상징적으로 막아주는, 또는 막아준다는 믿음을 주는, 그래서 그 소음을 외면하게 해주는 방음벽 같은 것이다.     


공적인 담에서 사적인 담으로

우리는 공적인 담은 낮아지는 시대에 사적인 담은 더욱 높아지는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학들은 담을 없애 학교 안과 밖의 경계를 없애고 있다. 시청이나 구청도 청사의 안과 밖을 경계 짓는 담은 없다. 길에서 스며들듯 공적 공간으로 들어가고 공적 공간은 스스로 조금이라도 몸과 문턱을 더 낮춰 그 본연의 임무가 무엇인지 스스로 웅변하고 있는 듯하다.      


담이 없어진 자리에 거대한 건물이 있다. 교회들은 담을 없앴지만 그 자체로 거대한 성채가 됐으며 그 성채를 지키기 위해 파수꾼이나 보초 대신 첨단 보안 카메라를 장착했다. 교인들에게 주차 스티커를 부착시켜 그들의 넓은 주차장에 들어올 수 있는 자와 불가능 한 자를 구분했다. 마치 임대 아파트와 분양 아파트를 담으로 가로막는 유치한 발상을 하는 어른들처럼 말이다. 아니 그 어른들이 다니는 교회라면 그 유치한 경계 지음을 당연시할지도.      


대학 또한 마찬가지다. 모두에게 교육의 벽을 낮추고 있지만 그것이 교육의 보편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족한 학생과 그로 인한 재정 부족의 메우기 위해, 더 나아가 자본의 탑을 더 높이 쌓기 위해 캐주얼한 교육을 파는 것에 불과하다. 학생들에게도 지식과 지성으로 쌓는 상아탑 대신 취업률이라는 성과로 쌓는 트로피를 강조한다. 쉽게 들어와 자격만 갖추고 세상에 나가라고 한다.      


평생교육원은 노인부터 아이들까지 만족시키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해 놓고 있다. 마치 대형 마트의 진열대처럼, 백화점 쇼윈도처럼 말이다. 겉보기엔 다 교육이고 문화고 인문학이지만 그 내면엔 돈의 탑을 쌓기 위한 상품 구색 맞추기의 고민이 존재한다. 


대학이 벽을 허물고 번화가와 인도와의 지리적 경계를 흐리게 하는 것은 결국 자본의 드나듦의 쉬움을 은연중 보여주는 상징에 불과할지 모른다. 누구나 드나들어 돈을 쓸 수 있는 공간이 되어 버린 대학. 그러나 정작 그 안에서 강의를 하던 강사들은 점점 밖으로 밀려나는 이상한 대학이 되어 가는 현실을 담고 있는 상징.      


거기에 인싸는 없다.

혼밥의 칸막이 같은 칸막이는 대학과 교회에는 없다. 대신 더 큰 칸막이를 세우고 있는지 모른다. 그 세움 속에서 정작 서로 만나고 학문을 나눠야 될 교육의 주체들이 대학이 처 놓은 벽으로 나뉘어 커다란 학문 공동체를 이루는데 실패하고 있는지도. 이곳엔 인싸도 아싸도 없다. 그들은 모두 대학으로부터 소외된 아싸다. 교회도 마찬가지. 그곳엔 인싸도 아싸도 없다. 진짜 인싸는 오직 신뿐. 그러나 신이 그 안에 계신지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네트워크 없는 네트

담이 없는 시대에 우린 사적인 담을 더 높이 쌓고 무선의 시대에 만들어진 네트워크는 연대를 위해서도, 차별을 위해서도 같은 힘을 발휘한다. 네트워크는 많아지는데 혼밥은 시장의 트렌드를 주도하는 현실. 우린 이 두 현상 간의 간극을 설명하기 힘들다. 둘 중 하나는 허상이다. 네트워크가 허상이라면 그것을 이루는 존재들은 다른 이름의 덩어리로 편입되지 않고 여전히 홀로 존재한 채 단순히 네트워크의 선 끝에 붙은 노드 같은 존재들의 망일 지도 모른다. 


그 점들은 타자를 위해서도, 우리를 위해서도 모이지 않는다.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서 네트워크는 존재한다. 여기서 네트워크의 건조함, 가상현실적인 성격이 드러난다. 그 네트워크는 연대도, 공동체도, 더 나아가 무슨 인연도 아니다. 그저 맥에 불과하다. 찰나적이고 필요에 의해 탄생한 맥.     


공동체 - 사람의 연결

과거, 우리의 전 세대처럼 함께 일하고 함께 밥 먹고 함께 경조사를 치러내던 시대의 네트워크는 그야말로 연대였고 공동체였다. 집에 전화가 없어도 상관없었다. 제대로 들리지 않는 이장의 마이크 목소리로 나오는, 그나마도 산에 부딪혀 깨지고 바람에 흐트러진 메시지를 알아듣기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용케도 다들 알아듣고 동네 한가운데로 모였다.      


네트워크 기술이 사람을 연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사는 것이 당연하고 그것이 사람 사는 것임을 아는 사람들이 어떤 기술 없이도 네트워크를 가능케 했다. 그 시대의 네트워크는 우리를 위한 연대였고, 타자를 위한 연대였으며, 나를 위한 연대였다. 우리를 통해 나를 봤고, 나를 통해 타자를 확인했다. 그래서 소위 말하는 준거집단이나 소속감, 공동체 의식이니 하는 것은 그것을 인식하기도 전에 존재했고, 강화됐다. 이 시대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이 평생 고향을 그리워하고, 결국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고 귀향 귀농하는 것은 그 네트워크가 그들의 뿌리 깊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뿌리 없는 사람들

노래 가사처럼 그 네트워크를 떠난 사람은 그야말로 뿌리 없이 물 위를 떠도는 부평초 같은 마음이자 나그네 같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혼밥의 시대에 부평초의 은유는 더 맘에 와닿는다. 부평초라는 게 별거 아니라 사실은 개구리밥이다. 뿌리는 있는데 흙에 박혀 있지 않아 물에 둥둥 떠다닌다. 우리가 호수에서 흔히 보는 연꽃처럼 연못 바닥에 뿌리내려 고정되어 있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부평초의 무리는 함께 떠다니지만 물살에 의해 흩어지고 다시 뭉친다. 무리는 그 형태와 크기가 계속 변하고 온 곳도, 갈 곳도 정해져 있지 않은 채 흐른다.      


지금의 혼밥은 네트워크의 무정형성과 미래의 불확실성, 이어진 타자와의 관계 지속에 대한 의심으로 인해 당연히 발생될 수밖에 없는 현상이다. 네트워크의 이 불안함으로 인해 우린 혼자 노는 법을 배울 수밖에 없고, 배워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성인이 돼서도 혼자 노는 법을 가르쳐주는 미디어와 방송들이 있다. 1인 방송이라는 말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나오는 시대가 올 줄 누가 예상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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