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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Oct 25. 2022

소확행, 또는 네 캔의 맥주

사물의 이유 : 다섯 번째 서랍 - 1인 라이프

하루키가 말하지 않은 것   

하루키가 말한 소확행이 혼자 고립되어 뭐든 하면서 행복을 찾으라는 맥락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경제 폭락 뒤의 일본 청춘들에게 행복의 목적과 의미를 돈이나 출세 같은 것에 두지 말고 일상 속에서 행복을 찾아보라는 격려의 차원이었을 것이다. 정작 본인은 한가롭게 카페를 하다 불쑥 소설을 써서 인기 소설가가 됐고, 심지어 일본 버블 경제 시대를 관통하며 그 시대를 잘 누렸다는 것은 슬쩍 감추고 말이다.     


맛의 차이? 브랜드의 착각?

이 시대, 이곳, 우리가 말하는 소확행은 이젠 네 캔에 만 천원인 수입 맥주로 함축된다. 그 네 캔 안엔 환각, 여행, 사치, 명품의 상징성이 다 들어가 있다. 이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수입 맥주 회사들은 이런 정서를 광고에 적절히 담고 있다. 물론 수입 맥주들은 맛의 차이를 강조한다. 그러나 크게 라거, 흑맥주, 바이젠, 에일, 필스너 등과 같이 주종에 따른 맛 차이가 크게 날 뿐 사실 같은 종류의 맥주 간의 맛 차이는 미묘하다. 그래서 일부 과일향이 나는 맥주들을 제외하곤 자신의 취향에 따라 맥주의 종류를 선택하면 그뿐이다.


맥주 회사들은 주종의 차이가 아니라 브랜드의 차이를 만들어야만 한다. 워낙에 겹치는 맥주가 많으니까. 예를 들어 일본 브랜드 맥주는 거의 대다수가 라거다. 94년에 일본 주세법이 바뀌어서 크래프트 맥주, 그러니까 하우스 맥주가 등장하기 전까진 만들기 쉽고 대중성 있는 페일 라거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지금 우리가 마시는 대부분의 일본 맥주는 페일 라거 종류가 대부분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일본 브랜드 맥주들을 고를 때마다 신중하고, 어떤 맥주를 좋아하는지를 열심히 설명한다.


솔직히 블라인드 테스트를 하면 중국의 칭다오 맥주, 일본의 기린 맥주, 아사히 맥주, 동남아의 타이거 맥주를 각각 구별해 낼 수 있을까? 웬만한 주당이 아니라면 라거의 맛 차이를 구별해내는 건 쉽지 않다. 브랜드 맥주는 이 같음 속에서 다름을 만들어내기 위해 광고를 한다. 모델을 쓰고, 상황을 만들고, 역사를 강조하고, 심지어 성적인 매력을 강조하기도 한다. 과거 클라우드 맥주 광고에서 전지현이 황금빛 드레스를 입은 채 화려한 야경을 배경으로 맥주를 마셔야만 했던 것도 같은 이유다. 맥주의 브랜드 차별화를 위한 이미지 형성을 위한 성적인 소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취향과 모험 사이에서

소확행을 위해 편의점 맥주 냉장고 앞에 선 우리는 최대한 다른 맥주, 새로운 맥주, 안 먹어본 맥주와 함께 자신이 좋아하는 맥주 하나를 끼워 넣어야 한다. 그것은 확고한 취향을 가진 자신을 만들어감과 동시에 새로운 것에 대한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진취적인 자신을 만들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 작업은, 그래서, 상당히 지난한 작업이 될 수밖에 없고, 편의점은 새로운 브랜드 맥주를 주기적으로 등장시켜줘야 사랑받는다. 새로운 맥주의 등장은 편의점의 가치를 높이고 소비자의 모험심을 자극한다. 소비자는 그 소소한 모험, 처음 보는 맥주를 선택하는 모험의 실현을 통해 자신을 일상 속 모험가로 만들 수 있다.      


세계맥주라는 말은 묘한 속임수다. 200개가 넘는 나라에 수천 개, 수만 개의 맥주 브랜드가 있고, 하우스 맥주 브랜드가 있다. 내가 아는 한 미국인 지인이 자신이 사는 도시에 즐겨가는 술집이 있는데 그 벽면이 온통 다른 맥주들로 차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 맥주들을 죽을 때까지 다 마셔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한탄했다.


그렇다. 세계 맥주라는 말은 낯선 세계의 신비로움을 입은 마케팅 구호일 뿐 현실은 그저 수입된, 수입 가능한 맥주들의 향연일 뿐이다. 난 아직 볼리비아나 칠레 맥주를 마트나 편의점에서 본 적이 없다. 심지어 가까운 몽골이나 카자흐스탄 맥주도 본 적이 없다. 생각해보니 러시아 맥주도 본 적이 없다.


우리가 편의점에서 만나는 맥주는 맥주를 잘 만들고, 잘 마시고, 또는 그럴 것이라고 알고 기대되는 나라들의 맥주들뿐이다. 또는 우리가 여행 가서 먹어 봤음직한, 그래서 맥주만 마시면 그 여행지의 추억을 떠올릴만한 맥주들이다. 그래서 인도네시아나 필리핀, 태국 맥주들이 맥주 종주국인 유럽과 미국 맥주와 나란히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기호의 사치

편의점 맥주는 그래서 본질적으로 맥주이기 전에 기호다. 속옷이 속옷이기 전에 하나의 기호이기 위해 디자인에 신경 쓰는 것처럼 말이다. 본질 이상의 것, 본연의 효능이나 효과 이상의 것을 덧입은 것이 현실의 청춘을 위로하고 있다. 세계는 멀고, 할 일은 많고, 시간은 없다. 높은 주거비용과 생활비로 인해 여행은 고사하고 떠들썩한 술자리조차 사치인 청춘들에게 일주일에 한 번, 심지어 한 달에 한번 마시는 만천 원에 네 캔의 세계 맥주는 사치다.


사치는 본연의 가치를 넘어서는 뭔가를 얻기 위해서 특정 수준의 돈을 지불해서 뭔가를 구매하고 소비하는 행위를 말한다. 세계 맥주는 맥주 이상의 가치를 갖고 있고, 그 가치를 위해 돈을 지불하기에 충분히 사치라고 부를만하다.      


이 사치는 여러 개의 맥락에서 행해진다. 일단 주량의 사치를 불러온다. 만천 원에 네 캔은 상당히 합리적으로 보이는 비합리적 행위다. 일단 하나를 사면 3000원 정도 하는 맥주인데 네 개를 사면 2500원 정도에 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 주량이 두 캔 정도라면 2500원에 하나의 캔을 사기 위해 네 캔을 사야 한다. 물론 네 캔을 산다고 해서 지금 다 마시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네 캔을 사라고 강요하는 마케팅 전략에는 네 캔 분량의 술과 함께 소비되어야 할 안주가 포함된다.

 즉 한 캔 정도는 안주 없이 마실 수도 있지만 네 캔 정도 되면 그건 술자리가 되고, 술자리가 되면 안주와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 아니 최소한 안주는 존재해야 하지 않을까? 결국 편의점을 비롯한 대형 마트의 네 캔 마케팅은 궁극적으로 네 캔을 마시기 위해서 필요한 다른 것의 마케팅과 연대하는 마케팅이다.     

 

사치는 과잉으로 이어진다. 사치는 보드리야르가 말한 대로 포틀라치적 소비다. 누가 더 많은 걸 부질없이 낭비하느냐의 문제다. 세계 맥주 네 캔은 어찌 보면 술 마시는 이들을 위한 과잉, 소박한 포틀래치적 장치, 그런 쾌감을 줄 수 있다.     


포틀래치, 또는 만취

이런 사치, 즉 유사 포틀라치 적 소비는 다이소로 대표되는 저가 생필품 매장에서 구현된다. 탕진잼이라는 단어는 그래서 이 유사 포틀라치 현상을 극단적으로 말해준다. 그리고 미래 없는 삶을 살아가는 이 시대 청춘들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사치는 무엇인지, 그 씁쓸한 현실을 알게 해 준다.     

 

어찌 보면 이 취함, 즉 술에 취함과 다양한 맥주 라벨링을 통한 가상의 세계여행의 도취감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잊게 하는 수면제, 그러니까 프로포폴과 같은 역할을 하는 건 아닐까? 부유층의 수면제와 최면제를 대신할 서민의, 가난한 청춘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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