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티를 벌이기에 충분한 저녁

딸 바보의 시간이 끝난 뒤 26

by 최영훈

자기 시험이 끝날 때까지 두 시간을 기다린 아빠와의 귀가 대신, 친구 아빠 차를 타고 친구와 함께 귀가하는 것을 택했던 딸에게 몇 마디를 한 뒤로 주말이 지나갔다. 그 후 삼일이 더 지났다. 그동안 딸은 아빠와의 문제를 어떻게 풀지 몰랐다. 목요일 오후, 이 며칠간 아빠의 마음을 스쳐갔던 생각의 갈피를 정리해 말했다.


너에 첫 번째 고사의 기억은 안 좋게 남았다.

그건 어쩔 수 없다. 아마, 네가 이 이후로 이런 큰 시험을 치를 때마다, 그런 너를 아빠가 기다려야 할 때마다 이 날의 일이 생각날 것이다. 네가 꺼내 든, 아빠가 꺼내 든 이 날의 이야기를 꺼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다. 안 좋은 기억이 남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다.


잠시 말을 끊었다. 딸은 아직 울지 않았다.


말을 이어갔다. "네가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널 기다리는 것이 아빠의 일이었다."라고 했다. 아니, 자식을 기다리는 것이 세상의 모든 부모의 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세월호의 부모들도 자식의 방을 치우지 못하는 것이고, 이태원 참사의 유족들도 자식 방의 보일러를 끄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아빠도, 나중에 네가 커서 밖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술이 떡이 돼서 집에 들어올 때까지 널 기다릴 거라고 했다.... 그게... 아빠의 일이라고 했다.


다시 말을 끊었다. 딸의 얼굴에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덧붙였다. 아빠는 세상에서 기다리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엄마랑 데이트할 때도 한 번도 엄마를 기다린 적이 없다고 했다. 줄 서서 식당에 들어가는 걸 혐오하고, 멍청하게 명품 매장 앞에서 줄 서본 적도 없으며, 놀이공원의 놀이기구 앞에서 줄을 서 본 적도 없다고 했다.


오직 널 기다리는 것만은 당연하게 생각했다고 했다. 어린이집 앞에서, 학교 앞에서, 학원 앞에서 너를 기다렸다고 했다. 그게 아빠의 일이고 책임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전혀 지루하지 않고 행복한 기다림이었다고. 그렇게 말해줬다.


딸의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나도 울컥했다.

그 뒤 딸은 아빠의 말에 답을 정리해 글로든 말로든 그 답을 내밀겠다고 했다. 그러나 마주 앉은 저녁 시간, 글도 말도 나오지 않았다. 딸은 그저 날 바라봤다. 그렇게 우린 화해 아닌 화해를 했다. 잠들기 전, 안아달라고 했다. 꼭 안아줬다.


<생각의 속임수>에서 권택영 교수는 “기억은 사랑이다. 누가 더 많이 사랑했는지 알아보려면 누가 더 자세히 더 많이 기억하는가를 알아보면 된다."라고 했다. 어쩌면 부모가 자식에게 지는 이유도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보다 부모가 자식을 더 많이 사랑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또 그만큼 더 사랑하기에 더 많이 기억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지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까지 기억하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아내의 지인 중에 딸이 사춘기를 심하게 앓는 바람에 이혼 직전까지 갔던 부부가 있다. 그때, 남편이 아내에게 그런 말을 했다고 한다. 저 애가 어렸을 때 저 예쁜 애 덕분에 우리가 얼마나 행복했고 주변에서 예쁜 딸이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생각하면서 이 시기를 넘기자고 했단다.


우리도 그럴 수 있을까? 앞선 글에서도 말했지만, 난 장담을 못하겠다. 그러나 분명, 아이가 더 커서 이런저런 일로 속상하게 할 때, 딸과의 기억이 그 상한 맘에 위로가 될 것이다. 아이와 함께한 아름답고 소중하고 따뜻했던 순간을 떠올리기만 해도 큰 힘이 될 것이다. 그 시간들이 찰나처럼 지나갔듯이, 철없이 부모 속을 썩이는 순간도, 돌아보면 한줄기 섬광처럼 지나갔음을 알게 될 것이다.


딸도, 자기 인생의 어느 시점에 늙어버린 아빠를 마주 보다 불쑥 깨달을 것이다.

아빠와 함께한 시간들이 쏜살 같이 지나갔으며 앞으로 함께 할 날들도 그렇게 빨리 지나갈 것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아빠와 함께하는 순간을 마음을 다해 누려야 한다는 것을, 그전에 최대한 많은 시간을 아빠와 함께해야만 한다는 것을.


그전에, 당장은, 올 겨울이다. 영재 시험 합격자 발표는 23일이다. 공교롭게도 크리스마스이브 전날이다. 아내는 합격하든 안 하든 파티는 할 것이라고 했다. 그날을 위해 미리 양갈비를 사놨다. 그날이든 아니든, 합격을 했든 안 했든, 크리스마스이브든 다른 날이든, 축하할 이유도, 날도 많다.


오늘도 그런 날이다. 딸도 무사히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왔고, 아내 또한 연말에 몰린 바쁜 일정 속에서도 길게 야근 안 하고 퇴근을 했다. 먼저 저녁을 먹은 우리를 놀리듯, 명란 하나를 야무지게 구워 저녁을 먹었다. 두 여자 다 씻었고... 이제는 잘 시간이다. 이만한 하루라면, 축하 파티를 해도 당연하다. 매일 파티를 할 수 없기에 날을 정해놓고 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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