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바보의 시간이 끝난 뒤 28
딸과 주현이의 커플 1주년 기념 선물에 장갑이 추가됐다.
엄마와 함께 사온 초콜릿에 진청색 니트 장갑이 함께 포장 됐다. 사연은 이렇다. 뉴스에서 전국의 한파를 긴박하게 알리는 동안 부산도 제법 추웠다. 물론 지도상에 파랗게 표시된 얼어붙은 동네에 비하면 따뜻한 편이지만. 등굣길, 두툼한 다운 파카와 그것과 한 세트인 양모 조끼를 입혔다. 토끼 귀가 달린, 한 때 유행했던 털모자도 씌웠다. 그런데 마땅한 장갑이 없었다. 애가 크는 동안 손도 컸을 텐데, 크는 몸집에 옷을 맞춰 사 입히는 동안 장갑을 사 줄 생각은 못했던 것이다.
결국 어느 저녁, 아내는 부랴부랴 장갑을 검색하기 시작했고 그러다 우연히 커플 장갑을 발견했던 것이다. 딸에게 커플 장갑은 어떤지 물었던 모양이고, 좋다는 딸의 응답을 듣고 아내가 주문을 해줬던 것이다. 그렇게 크리스마스이브를 하루 앞둔 금요일, 딸은 선물을 들고 학교에 갔다. 정성스럽게 긴 글을 남긴, 전날 아빠와 잡화점에 함께 가서 고른 귀여운 카드도 들어 있었다. 하굣길, 딸에게 물었다. 주현이는 무슨 선물을 줬는지. 주현이는 뒤늦게 주문을 해서 배송 중이라고 했단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이 날, 주현이가 보조가방을 들어줬다고 했다. 4학년이 있는 3층에서 1층의 현관까지 말이다. 그런가 보다 했는데 집에 와서 혹시나 해서 물었다.
"주현이가 오늘만 들어 준거야?"
"매일."
"야~남에 집 귀한 아들, 가방 셔틀이나 시키고. 참~"
"내가 들겠다고 했는데, 주현이가 계속 들어주는 거야."
앞서도 썼듯이 주현이는 아직 스마트 폰이 없다. 일 년 내내 무채색 옷, 그것도 특정 등산복 브랜드를 주로 입는다. 반죽도 좋아 인사도 잘하고 안정감도 있다. 게다가 이렇게 우직한 돌쇠 같은 면도 있다. 여하간, 이런 대화 끝에 딸이 그랬다. 주현이가 요즘 일주년 선물로 뭘 줄지 깊은 고민에 빠져 있다고, 오늘도 딸에게 하소연했다고 말이다. 그래서 집에 가서 지식인에게 물어본다고 했단다.
"야, 그런 건 엄마한테 물어봐야지." 내가 한마디 했다.
엄마한테 물어보면 엄마가 섭섭해하시려나? 형이 있으니까 괜찮으시려나. 참고로 형은 아직 여친이 없다.
다음 주, 올 해의 마지막 촬영을 마치고 집에 와보니 못 보던 화장품 같은 것이 보인다. 뭐냐고 물었더니 주현이가 준 선물이란다. 지식인에게 물어보지 않고 엄마에게 물어봤던 모양이다. 나 같은 화장품 문외한도 아는 유명 브랜드의 립밤과 핸드크림 세트를 선물로 받았다. 왜 이제야 말하냐고 엄마한테 한소리 들었겠지?
대학 시절 받은 가죽으로 된 항공재킷이다. 지금 어머니와 함께 텍사스에 살고 계시는 새아버지께서 주신 것이다. 벌써 25년도 넘은 재킷인데 여전히 그 모양을 유지한 채 멋을 뽐내고 있다. 요즘 다시 이런 스타일이 다시 유행하는지 가을에 종종 입고 나가면 젊은 친구들의 부러운 시선을 받곤 했다.
이것 말고는 생각나는 것이 없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삼십 대 중반까지, 근 이십 년 넘게 열심히 교회를 다녔던 터라 크리스마스를 연인이나 친구와 함께 알콩 달콩 보낸 기억도 없다. 물론 선물은 주고받았지만 대체로 서로의 형편에 맞는 소소한 것들이었거나 학업에 필요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내하고도 마찬가지다. 길게 연애하고 십오 년이 넘게 살고 있지만 크리스마스 선물을 챙기진 않는다. 그저 조촐하게 케이크를 사서 나눠먹거나 근처에 사는 처남을 불러 고기를 구워 먹으며 한 해를 마무리하는 날로 삼을 뿐이다.
이런 부부지만 아이의 크리스마스는 챙겨준다. 미국에서 큰 박스 하나 가득 선물이 담겨 날아온다는 걸 알게 된 이후부터, 딸에게 크리스마스는 꼭 선물을 주고받는 날이 됐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존재를 알게 된 이후부터는 자기에게도 선물이 올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게 됐다.
솔직히 몇 년 하다 말 줄 알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열 살이 넘어가면 그만둘 줄 알았다. 그러나 아내는 올해도 아주 치밀하게 준비하여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선물을 배송하는 데 성공했다. 우선, 선물 고르는 것부터가 은밀하다. 대체로 모바일로든, PC로든 쇼핑은 집에서 하는데 부득이하게 이 선물 고르기는 사무실에서 한다. 최소한 주문은 회사에서 하는 것 같다. 당연히 배송지도 회사로 해놓는다. 연말에 집에 온갖 택배가 와도 거기엔 선물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나 또한 그 선물의 정체를 알 수 없다.
자동차 키를 건넨다. “트렁크에 있는 선물 가져다주세요. 조용히 갔다 오세요.”
난 조용히 나간다. 추운 밤, 어두운 곳에서 트렁크를 열면 거기에 선물이 있다. 포장만 봐서는 뭔지 알 길이 없다. 그렇게 선물을 들고 조용히 들어와 트리 앞에 놓는다.
다음 날, 크리스마스 아침, 엄마 아빠가 늦잠을 자고 있는 안방에 흥분한 딸의 목소리가 들렸다. 올해의 선물은 귀여운 악마 캐릭터인 쿠로미가 그려진 파자마였다. 딸은 그 파자마를 입고 안방으로 들어왔다. 딸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주셨다며 좋아했다.
솔직히 확신이 없다. 믿는 건지 믿는 척을 하는 건지, 좋아하는 건지 좋아하는 척을 하는 건지. 제법 똑똑하고 정보 탐색과 분석에 밝은 딸이기에 더 혼란스럽다. 결국 모녀가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가만히 있다. 그러다 예쁘다고 한마디 한다.
아마 알아도 모르는 척, 조금 좋아도 아주 좋은 척하는 것도 내년 크리스마스면 끝날지 모른다. 그러나 오히려 그때부터 엄마 아빠 삼촌 할아버지 할머니를 포함한 식구들에게 줄 선물의 고민이 시작될지 모른다. 자신이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고 싶은 만큼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그 선물을 주고 싶어 할 테니.
그렇게 되면 영화 속 서양 사람들처럼, 선물을 사려는 사람들로 붐볐던 겨울의 백화점이나 마트를 종종 거리며 다닐지도 모른다. 그렇게 산타클로스의 빈자리는 가족의 사랑이 채우겠지. 연인과 친구의 사랑이 채우겠지? 아마 그렇게 소녀가, 아가씨가, 어른이 되겠지.
올해, 아내는 한 백화점에서 부산의 유명한 제과점의 좋아하는 케이크를 사 왔다. 롤 케이크 모양인데 안에 아주 고급스러운 크림이 들어 있다. 위에는 초콜릿 조각이 솔잎처럼 뿌려져 있고, 그 위에 크리스마스카드를 닮은 넓은 초콜릿이 꽂혀 있다.
그 케이크를 보고 있자니, 십 대 시절, 어머니와 단 둘이 보냈던 크리스마스이브가 생각이 났다. 그때 어머니는 서울의 어디 식당에서 힘들게 일을 하셨던 것 같다. 그렇게 일이 끝난 저녁, 어머니는 작은 초콜릿 케이크를 사 오셨다. 그때, 처음 초콜릿 케이크를 먹어 봤다. 초를 꽂고 켜고... 노래를 불렀던가? 난 교회를 다니기 전에도 산타클로스를 믿지 않았다. 산타클로스가 오기엔 우리 집은 너무 가난했으니까.
세월이 지나, 어느 해 크리스마스엔가는, 딸은 초등학교 시절의 산타클로스의 진실을 우리에게 털어놓을 것이다. 그 믿음을 지켜주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은 엄마에게 깊은 감사를 표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