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영훈 Jun 04. 2023

운동하는 여자 - 양민영

동해선에서 읽은 책 50

집에서 트레이닝 쇼츠가 다 젖을 정도로 컨디셔닝 운동을 하다, '이 화창한 휴일, 정오에 난 왜 이렇게 땀을 흘리며 운동을 하는 걸까?' 생각하다가, 불쑥 이 책이 다시 생각났다.


운동에 철학과 사유가 필요하다면 그건 철저히 자기 내부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래야 스스로를 납득시켜 꾸준히 운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가 왜 운동을 하는 가에 대한 확고한 자문자답이 완결된 후, 타자의 운동과 공동체의 운동, 더 나아가 스포츠 전반에 대한 사유가 이어질 수 있다. 그런 사유의 단계 없이 불쑥, 운동에 관한 이런 글 덩어리를 세상에 내놓으면 이런 책이 된다. 2023.0604


페친 중 운동하는 분들의 해쉬태그에 운동하는 여자가 있기에, '새삼 운동하는 여자를 강조하나.'싶었다. 페친의 게시물 중에 기사도 종종 뜨길래 봤더니 책 제목이다. 궁금해서 책의 목차를 봤다. 발췌문도 들춰 봤다. 자신의 경험담, 타인의 경험담, 당시 사회 이슈와 스포츠 계의 화두를 절묘하게 엮어 놨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사볼 만한 책은 아니어서 신경 안 쓰려고 했는데 알고 봤더니 책은 그녀가 오마이 뉴스에 연재한 칼럼을 엮은 것이었고 그 칼럼은 아직도 오마이 뉴스에 남아 있어 몇 개 읽어봤다.


세레나 윌리엄스와 페미니즘, 경력단절

너보라고 레깅스 입는 거 아니라는 말 같지도 않은 글은 논의 할 가치도 없으니 넘어가자. 제일 찝찝했던 부분, 운동과 스포츠에 대한 이해와 역사에 대한 간단한 검색조차 안하고 쓴 몇 개의 이슈에 대해서만 다뤄보자.


우선은 세레나 윌리엄스를 경단녀로 다룬 부분이다. 세레나 윌리엄스에 대한 관중들의 야유와 출산으로 인한 랭킹 하락을 비교적 자세히 다뤘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세레나와 페미니즘과의 상관은 따로 있다. 일단 세레나에 대한 야유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러니까 페미니즘 시각으로 보려면 그녀의 강인함에 주목해야 한다.


세레나는 80년대의 나브라틸로바와 함께 여자 테니스를 보는 남성의 관음증적 시선을 배반한 대표적 인물이다. 말하자면 그녀를 향한 야유는 남성 테니스팬, 심지어 여성 테니스 팬도 여성 테니스 선수에게 바라는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 스포츠 본연의 강인함만을 보여주는 세레나에 대한 야유인 것이고, 그 야유는 세레나의 선수 생활 내내 따라다녔다. 이건 이신바예바가 미녀선수들과의 경쟁에서 압도적인 능력으로 장대높이뛰기를 제패했을 때, 일부 남성 스포츠 팬들의 맥락 없는 비난과 맥을 같이 한다.


이러한 세레나 윌리엄스를 비롯한 여성 운동 선수의 강인함에 대한 남성적 시각에 대한 비판과 고찰은 여성 운동 선수에 대한 페미니즘 맥락에서의 논의에 한 부분에 불과하다. 금지 약물 복용으로 인한 출전 금지, 그로 인한 오랜 공백으로 인해 랭킹 포인트조차 없음에도 불구하고 미모에 기반한 상품성 때문에 2017년 WTA투어 포르셰 그랑프리 대회에 샤라포바를 와일드카드 선수로 초대했던 남성과 자본 논리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테니스계에 대한 비판, 더 나아가 경기장에서 남성팬에게 테러를 당했던 모니카 셀레스에 대한 논의까지 다루게 되면, 여성 운동 선수에 대한 페미니즘 시각에서의 사유를 더 풍성하게 할 수 있다.  


경력 단절에 대한 작가의 사유는 얄팍하다. 테니스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스포츠에서 선수들은 부상으로 인해 경력이 단절된다. 그러나 다들 그 단절이 무서워 대회에 참여한다. 테니스로 인해 부상을 입었다 하더라도 게임을 못하는 기간 동안 포인트가 없으면 랭킹이 하락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무명 선수들이 전 세계를 떠돌며 ATP투어를 다닌다. 부상을 안고서 말이다. 즉 경력 단절에 대한 사유를 발전시키면 페미니즘에서 휴머니즘으로, 즉 세레나뿐만 아니라 모든 선수들이 테니스계의 부조리함과 싸우는 현실까지 다뤄야 한다.


여성 선수의 상품성에 대한 미천한 사유

두 번째는, 론다 로우지를 보면서 비로소 격투기를 몰입해서 볼 수 있었다는 부분이다. 저자는 폭력적이고 분노를 표출하는 론다 로우지를 페미니즘의 표상으로 다루면서, 케이지 밖에서 남성 옆에 꽃처럼 앉아 있는 여성 관객 및 라운드걸과 비교했다.


이 진술에 앞서 저자는 남성 경기에 대해 먼저 서술한다. 이 부분에서, 남자선수의 경기에 몰입할 수 없었다는 진술은 주짓수를 수련하는 무도인이기도 한 저자의 생각으론 적절하지 않다. 이 진술이 자기 사유에서 발원된 자기 진술임을 인정한다면, 그녀는 케이지에 오르기까지 주짓수, 레슬링, 권투 등을 수년간 연마하며 피땀을 흘린, 남녀노소를 아우르는 동료 무도가에 대해 예의가 없거나, 아직 그 수고에 공감하지 못할 정도로 수련이 부족하거나, 근본적으로 타자에 대한 연민이 없거나임을, 이 셋 중 하나를 인정해야 한다.


론다 로우지를 페미니즘 맥락에서 말하려면 그녀의 상품성에 대해 말해야 한다. 데이나 화이트가 그녀의 아마추어 경력과 메달, 그리고 다른 단체에서의 화려한 퍼포먼스만으로 그녀를 캐스팅했다고 보면 오산이다. 그녀 이전에도, 그리고 그녀와 동시대에도 수많은 고수들이 있었다. 데이나 화이트가 그녀를 선택한 건 그녀가 금발의 백인인 데다가 미모를 갖췄기 때문이다. 즉 "여성" 격투가로써의 상품성이 다른 "여성"격투가보다 높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다. 그런 이유로 그녀의 UFC데뷔전이 타이틀전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데이나 화이트의 안목은 옳았다. 그녀가 연전 연승하다가 홀리 홈에게 패한 후 영화계, 심지어 프로레슬링계에서도 활동했다는 걸 보면 말이다. 이렇게 외도하던 그녀가 다시 케이지로 돌아온다고 했을 때 데이나 화이트는 당시 챔피언이었던 아만다 누네즈와 붙였다. 다른 콘텐더(챔피언 도전 자격을 갖춘 상위 랭커)들을 제쳐두고 말이다. 갈색 피부의 브라질리언 괴물 챔피언을 금발의 백인 도전자가 물리치는 걸 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만다는 론다를 샌드백 치듯이 두들겼고 그야말로 은퇴시켜 버렸다.


심판이 경기를 중단시키자마자 아만다가 검지 손가락을 입에 가져가 조용히 하라는 제스쳐를 한 채 케이지를 돌아다닌 행위에는 여성을 격투가로써가 아니라 성상품으로 먼저 보는 남성 중심의 UFC 수뇌들에 보내는 조롱이 담겨 있었다. 더 나아가 지금 이 순간에도 묵묵히 수련하며 자신에게도 도전자의 자격이 주어지길 기다리는 동료 유색인종 여성선수와 10전 이상을 해도 10연승을 하지 않는 이상 도전자 자격은 꿈도 못 꾸는, 저변이 상대적으로 넓고 깊은 남성선수들에게 보내는 위로와 응원의 싸인이었다.


이런 심도 있는 맥락 없이 하나의 인물, 사건을 한국 사회의 이슈의 프레임에 맞는 부분과 면만 확대해서 글을 쓰는 건 다른 종류의 오보이고 편향적인 글쓰기이다. 이런 글쓰기는 사실, 범주화에 저항하는 페미니즘 이데올로기의 본래 방향과도 맞지 않다. 게다가 내용조차 진짜 운동을 하려는 여자에게 별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운동을 가르쳐주지도 않고 운동의 철학도 말하지 않는 데다가 생활 스포츠와 프로 스포츠의 경계를 쉽게 넘나들면서 여성과 운동, 프로 스포츠계의 이슈를 두서없이, 그것도 얄팍하게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스포츠 전반에 대한 이해와 지식, 그리고 이데올로기와 철학이 부재한 글이어서, 요즘 잘 팔리는 페미니즘으로 포장했는지 모르겠다. 그 포장이 작가의 의도라면 차라리 낫다. 나름 생각이 있는 오마이뉴스나 지역에서 저명한 출판사, 거기에  소속 된 편집자의 전략이 아니길 바란다.


중고 서점에서 우연히라도 발견되면 틈을 내서 관심 있는 페이지를 넘겨 볼 생각이다. 책이 칼럼에서 발전된 부분이 없다면 굳이 책을 안 사도 된다. 오마이뉴스에 저자의 이름을 치면 여전히 칼럼이 뜨니 말이다.

2020.0705

매거진의 이전글 감각의 제국 ; 라캉으로 영화 읽기 - 권택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