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방학 권장도서의 참뜻

2020, 1월 첫째주 - 모든 아이가 소중하다.

by 최영훈

방학 숙제엔 꼭 해야 될 것이 없습니다.

일기, 독서, 운동 외의 모든 숙제는 사실상 권장하는 것입니다. 일기는 주 2회, 독서는 주 1회 한 후 감상문을 쓰거나 감상화를 그리는 등의 다양한 활동을 하면 됩니다. 운동은 매일 하루 30분 이상, 1가지 이상 운동하는 것이죠.


선택 과제는 네 개의 영역에서 스물한 개나 됩니다. 이 중에서 공식적으로는 한 가지 이상만 하면 됩니다. 은채는 여섯 개 부분에 동그라미를 쳐 놨습니다. 여기에 EBS 방학 특집 방송을 봐야하죠. 어린 시절의 <탐구생활>이라고나 할까요?


은채는 과제들을 충실히 하고 있습니다. 줄넘기하기 추운 날씨에는 방송 댄스 시간에 배운 춤을 무려 30분 이상 추면서 운동하기 과제를 해내고 있고, 종종 아빠와 돼지 씨름을 하기도 합니다. 덕분에 아빠의 골반 근육이 강화 되고 있고요.


학교에선 독서를 위해 30권의 책 목록이 들어가 있는 1학년 권장 도서 목록을 줬습니다. 은채는 아빠와 함께 학교 도서관, 주민 센터 도서관, 알라딘 중고서점을 오가며 책을 빌리거나 사서 읽고 있습니다. 이 책들의 분야가 제법 다양합니다. 역사, 과학, 문화, 문학, 사회 등 전 분야에 걸쳐 고르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외국작가와 한국작가도 고르게 있고요. 재미있는 건 난이도랄까 수준이랄까 이런 게 천차만별이라는 겁니다. 어떤 책은 제법 글도 많고 두께도 있는 중편 소설 같지만, 어떤 책은 그야말로 그림 동화 같은 책도 있습니다. 선생님들이 얼마나 심사숙고 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KakaoTalk_20211108_131522960.jpg 3학년 여름 방학 권장도서 목록, 직접 받아 쓰게 했다.

1학년 뿐만 아니라 성인들도 읽기의 수준은 천차만별입니다. 그래서 독서는 자기 취향과 수준에 맞춰서 하는 것이지 남들 다 읽는 책을 읽는 것은 아니죠. 그러면 오히려 너무 쉽거나 너무 어려운 책을 읽어서 흥미를 읽거나 좌절해서 책과 담을 쌓을 수도 있죠.


아이들도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아니 아이들은 더하겠죠. 권장도서 30권 중에 쉽게 읽어낼 책이 없다면 아이의 좌절감은 상당할 겁니다. 그 아이의 부모가 겪을 불안도 제법 클 테고 말이죠. 우리 아이만 너무 처진 거 아닌가 싶어서 방학 때 뿐만 아니라 2학년 때부터 사교육에 박차를 가할 수도 있고 말이죠. 그래서 선생님들은 분야와 난이도를 고르게 분포 시켰습니다. 어떤 책이라도 한권을 다 읽었다는 성취감을 맛보게 하기 위한 전략적 배치인 것이죠.


은채랑 서점에 가면 아이와 함께 온 부모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부분 엄마들이죠. 저처럼 스마트폰으로 목록을 확인해 가면서 권장도서를 찾아다닙니다. 아이들은 그런 엄마의 속도 모르고 학습 만화 코너 앞에서 떠날 줄을 모르죠. 학교 도서관을 가도 아이들이 제일 많이 읽고 있는 게 그런 것이니까요.

은채는 요즘 모험과 추리가 섞인 책을 좋아합니다. <수학 유령>시리즈나 앤디 그리피스와 테리 덴톤의 <나무집>시리즈도 좋아합니다. 이번 방학에도 중고서점에서 권장 도서인 미하엘 옌데의 <마법의 설탕 두 조각>을 사면서 <수학 유령의 스파이 수학>을 함께 사줬고, 주민 센터 도서관에서는 권장 도서 대신 <78층 나무집>을 빌렸죠. 그래서 지금 은채의 책상 위에는 사고 빌린 권장 도서 네 권과, 희망(?) 도서 두 권이 나란히 있죠.

KakaoTalk_20211108_131730509.jpg 책을 읽고 나면 이런 활동지를 합니다.
KakaoTalk_20211108_131924282.jpg 13층씩 집이 커져 가는 마성의 시리즈

알다시피 초등학생부터 어른까지 권장 도서 목록은 많습니다. 언론이나 유명한 대학에서는 “꼭 읽어야 할 한국 문학.”, “대학 새내기가 꼭 읽어야 할 고전 100선.”, “최고 경영자가 선택한 여름휴가 때 가져갈 책.”등을 소개하죠. 솔직히 이런 책들 중에 흥미를 끌거나 쉽게 손에 잡히는 책은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반대로 “올 여름 최고의 미스터리 10선”이나 “000이 추천하는 호캉스를 더 시원하게 하는 스릴러”와 같은 장르 문학을 권하기도 합니다. 평소에 독서를 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어느 권장 도서 목록이라도 읽을 책을 고르는 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은채의 학교에서는 1학년 때부터 범위와 난이도를 넓게 해서 권장하는 것이겠죠. 스스로 읽어가면서 평생의 독서 취향을 형성해 나가도록 말이죠. 아마 매 학년, 매 방학 때마다 이 목록은 계속 제시 될 겁니다. 은채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친구들이 이 목록을 쫓아 갈 테고요. 그러나 이 목록을 쫓아가다가 정작 책을 읽는 재미 그 자체를 놓치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빠는 엄마 몰래 신나는 책을 사줍니다.


KakaoTalk_20211108_092948138.jpg 은채가 읽고 싶어하는 셜록 홈즈 전집

은채는 요즘 제 서재에 꽂힌 이윤기 선생님이 쓰신 <그리스 로마 신화>에 눈독을 들이고 있습니다.

자기가 학교에서 읽었던 그것과 제목은 같지만 훨씬 두꺼운 세 권의 책을 말이죠.

“아빠, 저 책엔 그림이 없어?”

“아. 아마 사진이 더 많은 걸?”

은채는 서재를 오갈 때마다 슬쩍 책 등걸을 보고 나갑니다. 아마 언젠가는 셜록홈즈 전집과 함께 그리스 로마 신화도 자기 책 인양 읽을 때가 오겠죠. 그때까지 우리 부녀는 열심히 서점과 도서관을 헤맬 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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