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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Jul 04. 2024

살아남은 자가 살아가는 자에게

그날의 시로 오늘의 너를 위로한다. 34

나의 사랑은 오늘의 것이다   

  

                                  양성우     


요즘 나는 백척간두에 서 있다.

일에 묻히고 사람 속에 묻히고

내 손으로 내 꿈을 접으며

힘든 하루를 보낸다.

절망의 끝이 시작이라고 했던가?

아무리 깊은 수렁일지라도

죽는 날까지 비겁하지 말아야지.

이름을 지우고 몸을 낮춰

숨어 사는 곳에도 바람이 불고,

이 벌판에 벗은 나무로 흔들리며

지는 해를 바라보는 나에게는

어제와 내일이 없다.

나의 사랑은 오늘의 것이다.


나무의 침묵

나무는 여간해선 소리를 내지 않는다. 집에서 딸의 학교까지, 등굣길을 가든 메운 나무들은 조용하다. 박물관 담을 따라 늘어선 메타세쿼이아도, 인도에 가로수로 심긴 은행나무도, 조각공원의 목련과 버드나무도, 벚나무와 모과나무와 매실나무도, 겹벚꽃나무와 마로니에 나무도, 학교 앞 공원의 동백나무와 플라타너스와 캐나다 단풍나무도 조용하다. 바람이 불어야, 비로소 소리를 낸다. 큰 나무일수록 크고 강한 바람이 불어야 소리를 낸다. 돌이켜보면 나무의 소란은 드물다. 일 년 내내 지구의 기상이변과 그에 따른 변덕스러운 날씨 뉴스가 줄을 잇는 거에 비해, 나무의 소란은 드물다.      


딸을 데리러 학원 앞에 가, 그 앞 인도에 서서 건너편 박물관 옆 뜰에 버티고 선 메타세쿼이아에 시선을 고정하곤 한다. 눈이라도 좀 쉬라고, 푸르고 높은 나무를 한참 바라본다. 유엔 로터리를 통하여 이 길, 저 길로 가면 부산의 중구와 진구, 수영구와 해운대에 닿을 수 있기에 학원 앞 차도는 늘 차로 꽉 차 있다. 딸이 학원에서 나오는 시간인 여섯 시 무렵엔 말할 것도 없다. 그 차 안에 탄 사람 중 누가 저 나무에 눈길 한 번 주겠는가?


그러나 태풍이 예고된 날, 그 전조의 기운을 담은 범상치 않은 바람이 나무를 흔들어 소리가 나면, 나무가 소란스러우면 모두들 움찔한다. 길을 걷는 사람도, 신호 대기 중인 차들도 나무의 눈치를 본다. 이 정도 바람에 쓰러질 나무가 아니다. 어지간한 태풍에도 버티었다. 잘해야 잔가지 몇 개, 잎사귀 몇 조각, 설익은 열매 몇 개 도로에 떨굴 뿐이다. 그것들, 그 소란의 잔해들이 치워지면 나무의 소란은 다시 모두에게 잊힌다. 다시 바람이 불 때까지.     


나무는 바람이 멎길 기다릴까? 아니면, 바람이 없는 곳을 꿈꿀까? 그런 곳은 없다. 버티는 것이다. 내가 뿌리내린 곳에서 버티는 것이다. 바람의 세기를 예측하지도 않는다. 바람의 끝이 언제인지 받은 계시도 없다. 그저 묵묵히 버티는 것이다. 바람이 없는 땅은 없다. 고난을 피해, 삶의 소란스러움을 피해 도망친다 한들, 거기인들 그 바람이 없으랴. 그러니 바람이 불면 부는 데로, 고용하면 고용한 데로 오늘을 산다. 봄이 되면 꽃을 피우고, 여름이면 이웃한 나무와 경쟁하듯 푸르고 가을이면 미련 없이 잎들을 떨군 뒤, 겨울의 매서운 바람을 견디는 것이다. 그렇게 버틴 끝에 마주한 계절에 감사하는 것이다.


언 강을 건너며     


내일을 살기 위해 입술을 깨물고

무시로 치솟는 보이지 않는 불길을

내 손으로 누른다.

아무에게나 세월은 약이 되는 것인가?

가슴에 깊이 파인 상처 때문에

뜬눈으로 새운 밤은 셀 수도 없다.

절망하지 마라, 남은 날은 길다.

힘든 삶 속에서는 누구나 외롭고,

막다른 길에서는 더욱 그렇다.

차라리 지난날의 흔적들은 짐이 되고

덫이 되고,

언제 어디에서나 내가 아닌 나,

내일을 살기 위해 오늘도 산그늘을

밟고 언 강을 건넌다.


나무는 나무로 살다 죽는다. 베어져 쓰임에 따라 산산조각 나 뿔뿔이 흩어져도 나무 고유의 결과 이름을 잃지 않는다. 그 나무로 만든 건, 그 나무의 결과 부피를 갖고 있다. 사람은 힘들다. 자기답게, 나답게, 내 이름을 잃지 않고 사는 것이 쉽지 않다. 그렇게 산 것이 부끄러워서, 나를 잃고 살아온 세월로 인하여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 나를 버리는 것도 쉽지 않다.      


어디 낯선 곳에서 새 이름으로 새 인생을 살고 싶어도 맘대로 되지 않는다. 오늘의 나는 어제로부터 뚜벅뚜벅 걸어온 나이기에, 오늘의 나에겐 어제의 여정이 만들어준 꼬리표가 붙어 있다. 아니, 어쩌면 비행운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난 이미 저기 가 있는데, 내 흔적은, 숨기고 싶은 흔적은, 심지어 남겼는지도 모르는 흔적이 뒤에 남는다. 기억되고 추억되고 반추된다. 아이러니다. 나로 사는 것도, 나를 잃고 새로운 내가 되는 것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절망할 수 없다. 시인의 말처럼 남은 날들이 긴 사람에겐 절망도 사치다. 어제와 내 이름과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내일로 향한다.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

....


이미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이 순간에,

서 있거나 움직이거나 상관없이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

오직 하나,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들은 무엇이나 눈물겹게 아름답다.


긴 터널의 끝에서 다가오는 빛은 눈부시다     


운명의 흐름에 몸을 맡길 뿐이다.

이대로 가다 보면 언젠가는

그곳에 닿으리라

영원의 한 순간에 살면서도

산 너머 산이요 물 건너 물인 것은

인생이기 때문이다.

깊은 시련 속에서는 희망이란

누구에게나 헛꿈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을 살리는 힘을

가지고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

아무리 하루하루가 힘겨울지라도

하늘에는 맞서지 마라.

한 치 앞을 모르고 가는

굽고 거친 길.

긴 터널의 끝에서 다가오는 빛은

눈부시다.


산 자의 것

살아 있는 것이 아름다운 것은 희망 때문이다. 살아 있는 자만이 내일을 볼 수 있다. 미래라는 단어는 산 자의 것이다. 터널의 빛이 통과한 사람에게만 보이는 것처럼, 애벌레에게 나비의 가능성이 응축되어 있는 것처럼, 걷지도 못하는 새끼 호랑이에게 맹수의 포효가 숨어 있는 것처럼, 오직 산 자에게만 미래가 있다. 결국, 가야 한다. 살아가야 한다. 터널 끝까지 가야 한다. 응축된 것이 터질 때까지 살아야 한다. 죽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나비의 꿈을 꾸고, 산하를 울리는 포효 한 방을 꿈꾸며 살아, 가야, 한다.      


희망은 보이지 않는 사람에겐 사치다. 절망의 문턱에 막 들어선 사람에겐 헛된 꿈같다. 위로의 시, 위로의 말은 사치스럽다. 터널의 길이를 모르고 막 들어선 이에게 끝이 보일 거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장마도, 겨울도, 절망도 다 끝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듣기 싫다. 외면하고 싶다. 날 그냥 놔두라고 소리치고 싶다. 그러나 우리, 이 당연하고 자명한 사실을 잊지 말자. 죽은 자는 잠을 자지 않고 꿈도 꾸지 않는다. 산 자만이 밤을 맞이하고 잠이 들고 새벽을 맞이하며 그 사이 꿈을 꾼다. 심지어 불면증조차도 산 자의 것이다.


산 자만이 산 자를 위로할 수 있다. 그러니 어디 가서 위로를 받을 수 있겠나. 시와 음악, 우리를 위로하는 모든 예술과 그것을 창조한 먼 옛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우리 곁에서 살아 숨 쉰다."는 표현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단언컨대, 산 자가 산 자를 안는 것보다 더 큰 위로는 없다. 산 자가 산 자와 함께 우는 것만큼 큰 위로는 없다. 장례식 장에서, 살아남은 이의 곁에서 우리가 함께 밤을 새우는 것은 저 뒤에 죽은 자는 살아남은 이의 슬픔을 위로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슬픔도, 위로도, 그리고 함께 지새운 후 맞이하는 새벽도 오롯이 산 자의 것이다.


판본을 보니 2000년 11월 25일에 초판 1쇄를 찍어, 12월 1일에 발간을 했다. 책을 찍고 일주일을 묵혀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시인은 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냈다. 현실 정치에도 참여했다. 선거 때마다 이름을 조금씩 바꿨던 민주당에서 세 번의 선거를 치렀고 그중 한 번은 당선이 되어 국회의원도 한 번 했었다. 이 시집은 그 격변을 다 겪어낸 뒤 낸 시집이다. 승리와 패배, 성공과 좌절, 음지와 양지를 오가며 살았던 나날들을 뒤로한 뒤 맞이한 오십 대 후반에 낸 시집이다.    

  

그러나 시집이 나 온 이듬해, 이회창을 지지하며 그의 선거를 도왔고 그 뒤엔 이명박의 선거도 도왔다. 학연이 그를 이끌었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그는 이천 년 대 이후, 김지하, 황석영과 더불어 문학계의 변절자라는 말을 들으며, 김문수, 하태경, 이부영, 이재오, 서경석과 묶여 취급되기도 한다. 오히려 그의 이런 사정들로 인해 저 시들이 더 진솔하게 읽히는 건 왜일까? 산 자만이 살기 위해, 살아내기 위해, 살아나가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기에?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를 제외하곤 시의 전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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