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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날씨를 바꾼다. - 서동욱

동해선에서 읽은 책 92

by 최영훈
사랑하는 이의 웃음은 태양 아래 마개를 연 환타 한 병처럼 세상을 오렌지 빛깔로 만든다. 분명 두 사람 위를 지나간 것은, 기상청의 예보를 바꾸고 갑자기 자신의 항로를 만들며 나타난 태양이다. 탄산수 한 병이 분무기처럼 뿌려대는 입자의 우주 속에 물처럼, 빛처럼 나타난 태양. 삶은 곧 파괴될 것을 알면서도 영원히 그것을 응시하며 웃고 싶다. 모든 장애물을 걷어내고 자신의 날씨를 찾게 된 순간에, 일상의 작은 문으로 들어서는 그 놀라운 순간에 대한 감사를 간직하지 않았다면 나는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 서동욱,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 P.11.


구름을 보는 일상

요즘, 구름을 자주 본다. 뉴스 속 일기예보는 기단과 전선의 실랑이를 선과 색으로 표현하고, 그 드잡이가 잠시 멈췄을 때 비집고 들어오는 무더위에 대해서 경고하지만 맑은 하늘과 그 하늘을 마치 2배 속으로 보는 유튜브 영상처럼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의 풍부한 표정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아니 말할 수 없다. 그 표정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이에게만 보이는 것이고 그 보는 이가 스스로 찾아내고 느끼는 감정이기에 그렇다.

토요일, 금요일에 여름 방학이 시작된 딸과 딸이 주기적으로 가는 한의원에 갔다. 아내는 이날 오전 온천장까지 가서 발레를 하고 왔다. 주말에 가던 백화점 문화센터의 발레교실이 내부 공사로 장기 휴강 됐는데, 그게 못내 아쉬웠던 몇몇 회원들이 뜻을 모아 일주일에 한 번, 주말의 무용 연습실을 빌렸다. 그 연습실의 위치가 온천장이다. 부산 사람이 아닌 분들을 위해 주석을 달면, 내가 사는 대연동과 온천장은 자동차로는 대략 20분 이상, 지하철로는 40분 이상 걸리는 거리다.


발레를 갔다 와 지친 아내를 집에 두고 딸과 함께 지하철을 타고 갔다. 부산 지하철 2호선 서면역에서 1호선으로 갈아탔다. 서면에서 노포 방면으로 가는 지하철은 교대역까지 지하로 가다가 그 역을 벗어나며 지상으로 나온다. 동래에서부터 고가 철로로 가는 1호선은 종착역인 노포역까지, 그렇게 동래구와 금정구의 풍경을 고스란히 창가에 담고 간다. 이때, 이 지하철을 처음 타는 아이들은 창에 코를 박고 풍경을 감상한다. 노포행 열차의 왼쪽으로 부산대와 금정산이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윤산과 대동대학교와 부산가톨릭대학이 보인다. 노선을 따라 온천천이 흐른다.

교대역에서부터 서서히 머리를 내밀고 나오는 지하철 안으로 여름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딸은 헤드셋으로 One OK Rock의 음악을 듣고 있었고 난 서동욱의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의 마지막 몇십 페이지를 읽고 있었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고개를 들어 햇살을 맞이했다. 지하철이 지상으로 완전히 올라오자 딸은 이 지하철을 처음 타서 지상에 올라오는 경험을 했던 다섯 살 때처럼 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거기엔 도시와 구름과 하늘이 담겨 있었다.


짧고 아름다운 한순간이 있고, 남은 삶은 그 한순간의 조명(照明)을 받고서만 모습을 나타낸다...... 최고의 순간은 그 자체로 충족적이다. 그 이후에 흘러가는 시간은 바로 이 순간의 의미를 지키고 또 반복하는 것으로서 존재할 것이다., pp. 284~285
만일 과거의 빛나는 한순간이 지금 순간에 개입해서 더할 나위 없이 의미 있고 소중한 현재를 만들어낸다면, 우리는 벤야민의 말을 빌려 현재의 모든 순간은 메시아가 들어오는 작은 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순간은 그 자체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현재의 사건으로 변화한 채 다가오기에 우리에게 현재는 늘 새롭고 유일무이하다., P.290


사진들

한의원에서 나온 건 네 시가 좀 넘어서였다. 한의원의 계단을 내려오면서 근처 카페에서 음료수를 사 먹는 건 어떨까, 하고 물었다. 딸이 좋아하는 음료는 대형 플라스틱 컵에 이런저런 단 것들이 잔뜩 들어간 무슨 무슨 프라푸치노였다. 그걸 들고 지하철을 탈 수는 없으니 오다가 본 슈퍼에서 간단한 음료 한 잔을 하자고 했다. 딸은 탄산수를, 난 논알코올 맥주를 샀다. 온천천 위에 올라 선 장전역은 아주 짧은 다리를 건너 들어간다. 우린 그 다리 위에서 온천천과 장전역과 구름을 보며 음료를 마셨고, 틈틈이 사진을 찍었다.

오늘 이 순간들은 기억될 것이다. 어쩌면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한의원은 팔월에 다른 곳으로 이전하는데 그곳은 1호선의 거의 끝이라 지하철로 가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조건이 아니어도 이와 똑같은 반복은 어렵다. 2024년 7월 27일, 오후 네 시 이십 분 즈음의 장전역과 구름과 온천천이 함께 만든 풍경, 그 풍경을 바라보며 마신 음료와 찍은 사진과 가벼운 수다는 반복될 수 없다.

서동욱은 들뢰즈의 이론, 특히 차이와 반복에 대해서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물론 곳곳에 그의 이름과 관련한 힌트들을 슬쩍 뿌려놓았지만 더 깊이 들어가진 않았다. 대신 그것이 일상 속에서, 우리의 인생 속에서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지 보여준다. 마치 말씀이 육신의 옷을 입는 것처럼 말이다. 니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니체가 혐오해 마지않았던 권위와 허무주의와 납빛의 이성에 대해서도 깊이 말하지 않는다. 대신 여름 오후의 햇살 같은 삶의 눈부신 찰나와 그 찰나의 만끽에 대해서만 말할 뿐이다.


(사랑한다는 말은) 나날의 성사(聖事)로서 우리 사이에 귀중한 관계를 만든다. 성사의 의의는 시행되는 데 있지 이해되는 데 있지 않다., P199
우리는 나이가 든다. 세월이 삶을 실컷 갈아먹은 뒤 긴 숨바꼭질 놀이를 끝내듯 마주친 너는, 어느 처연한 겨울 앞자락에 선 듯 한두 점 하얀 깃털을 머리카락에 얹은 채 축제일의 밤처럼 환했던 지난 시절의 거리들을 쓸쓸하게 만든다. 거기서 우리는 웃고, 즐거웠지. 약속들로 가득 차 있던 시절은 다 어디로 갔는가? 무엇인가 아까운 것을 잃어버린 것 같았으나, 지난 세월은 번잡한 거리에 쏟아진 금화들처럼 흩어져 이제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제대로 알기 어렵다. 삶은 쇠락한다., P.291
축제는 언제나 새로운 사건으로 찾아온다. 그것이 축제의 시간, 반복의 본질이다. 반복은 이미 존재한 것의 반복이 아니라,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도록 하는 반복이다...... 그러니 인간에게 축제가 있는 것은 축복이다. 축제는 인간이 하루하루를 잃어가며 늙어가는 운명을 벗어나 매번 새로 태어날 기회이기 때문이다. 축제 속에서 삶은 되찾을 수 없는 시간으로 추억되는 것이 아니라 매번 새롭게 실현된다. 우리가 설레는 마음으로 축제를 기다린다면, 축제가 시작과 삶을 돌려주기 때문이다., PP322-323


순간의 생산

장전역에 올라가 또 사진을 찍었다. 딸에게 플랫폼 끝까지 가보라고 했다. 함께 갔다. 그 끝에선 안전 창문 너머로 오른쪽으로 완만하게 커브를 그리고 있는 고가 철로를 볼 수 있다. 딸은 거기서도 사진을 찍었다. 다른 승객들은 에어컨이 나오는 승객 대기실에 옹기종기 모여 있을 때 철없는 아빠와 에너지 넘치는 딸은 플랫폼을 오가며 사진을 찍었다. 구름과 오래전에 지어져서 특이한 구조를 갖고 있는 장전역을.

서점에 갔다. 집인 대역연을 지나 센텀역에 내려 알라딘 센텀점에 갔다. 딸은 방학 때 영어 원서를 읽고 싶다고 했다. 그런 딸에게 유독 원서가 많았던 센텀점이 생각났던 것이다. 마침 나도 그 지점에 사고 싶었던 책 몇 권이 있었다. 가벼운 내 용돈 통장을 고려했을 때, 딸의 책을 사는 김에 내 책도 슬쩍 끼워놓을 기회였다.


딸은 앤디 위어의 <The Martian>의 페이퍼백과 빌 브라이슨의 <A Short History of Nearly Everything>의 페이퍼백을 가져왔다. “아빠, 영어 원서는 왜 이렇게 종이 질이 구려?”하면서 말이다. 난 미국 책의 두 유형에 대해 잠시 설명하며 펄프픽션의 유래까지 그 설명을 이어갔다. 내가 사고 싶었던 책은 이미 팔렸다. 그러나 다른 사고 싶은 책이 있었다. 내가 고른 책은 네 권이었다. 이 중 두 권은 딸의 책에 끼워 공용 카드로 결제 한 번, 다른 두 권은 내 용돈 통장 체크카드로 결제했다. 딸에겐 비밀로 해달라고 했다. 딸은 실눈을 뜨고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작게 몇 번 끄덕였다.


반복되는, 그러나 같지 않은

“삶은 쇠락한다.”는 말과 같은 진리가 또 있을까? 더 냉정하게 말하면 우린 모두 죽는다. 죽음을 향해 가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살아 있는 순간을 누리는 것이다. 그건 권리이자 의무다. 살아있는 순간은 축제여야 한다. 서동욱이 차마 하지 못한 말은 어쩌면 이거였을지 모른다. 가톨릭 신자인 그는 사랑의 “말”에 대해서만 말한다. 에필로그의 제목도 <쓰다듬는 손길>이다. 나였으면 애무하는 손길이라고 했을 것이다.

며칠 전, 오르가슴이 온몸을 관통한 후 침대에 너부러져 있을 때, 아내가 숨소리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나이 들어서 잘하는 남자 만나면 헤어 나오지 못하는지 알겠네.”, 그리고 쿡쿡 웃었다. 극찬이다. 이후, 제대로 된 섹스를 해 본 적 없는 여자가 나이가 들어서 섹스를 한 후에 거기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이 더 무서운지, 아니면 그 재주가 미천한 놈과 적당히 맞추며 살다가 우연히 재주 좋은 놈을 만나 신세계를 경험한 뒤, 거기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이 더 무서운지, 잠시 토론 같지 않은 토론을 했다. 아내는 후자를 지지했다. 맨 날 한 접시에 몇천 원짜리 회전 초밥이나 먹다가 처음으로 제대로 된 초밥 집에 초밥을 먹으면 다시 그 몇 천 원짜리 초밥을 먹을 수 있겠냐며 말이다. 그런가? 잠시 후, 아직 쓸 만한 남편의 허벅지를 부드럽게 만졌다. 아내의 가슴에 가벼운 키스를 한 후 씻으러 갔다.


순간이다. 서동욱이 책에서 얘기했듯이 우린 섹스를 통해 죽음과 탄생을 반복해서 경험한다. 들어감과 나옴, 짧은 경련과 숨 멈춤, 사지의 끝까지 울리는 쾌감의 진동. 어제의 그 사람과 오늘 그 “섹스”를 반복하지만, 같은 섹스는 없다. 인생의 모든 것이 그러하다. 여름 하늘에 같은 구름이 없듯이, 딸이 여름방학 내내 볼 그 모든 구름의 형상이 그러하듯 우리의 일상 또한 그렇다. 일상이라는 이름에 속아 타성에 젖어 사는 사람에겐, 어디를 가든 스마트 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에겐 그날이 그날 같겠지만 그날과 같은 그날은 없다.


이런 맥락에서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는 제목은 두 번의 뒤틀음이다. 철학은 날씨는 고사하고 도시도, 지하철 노선도, 내 가벼운 통장도, 딸의 키도 바꾸지 못한다. 그러나 또, 철학은 바꿀 수 있다. 이 모든 걸 새롭게 보게 함으로써 이 모든 걸 어제와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있다. 어제와 같은 구름이려니 하고 고개를 처박고 걸어가는 이에게 구름은 말을 걸 수 없다. 구름은 올려다보는 이에게만, 자신의 변화를 눈길로 쫓는 이에게만 새로운 모습을 보인다.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반복된 적이 없는 그 관능적이고 부풀어 오른 하얀 육체를.

서동욱이 말하는 건, 그것도 아주 조심스럽게, 어려운 이론을 말하지 않으면서, 우리의 일상과 문학과 예술을 통해 말하려 했던 건 이것이다. 심지어 이 책의 표지가 이런 것도 같은 이유다. 모든 건 같지만 모든 것은 또 다르다. 삶은 반복되지만 아무것도 같지 않다는 그 말을 하기 위해서.


글 속 사진은 딸이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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