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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서서 오랫동안

딸과 함께 꽃을 보네 10-바위취

by 최영훈

다르고 닮은 꽃들

우리야 서로를 구분하여 알아보지만 동물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의 외형은 거기서 거기일 것이다. 기껏해야 피부색, 그리고 마르고 뚱뚱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리라. 포식자에겐 먹음직스러운 인간과 그렇지 않은 인간, 연약한 동물에겐 피해야 될 대상으로만 인식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꽃은 인간과는 비교도 안 되게, 저마다 다르게 생겼다.


다르게 생긴 꽃들이 잎의 개수와 색의 조합, 꽃의 크기에 따라 종류를 무한히 파생시키니 꽃의 이름은 언제나 우리 뇌의 저장능력을 상회한다. 게다가 그 다름이 미묘하여 구분이 어려운 꽃들이 많으니 이 꽃이 그 꽃인지, 저 꽃이 그 꽃인지 헛갈릴 때가 있다. 나팔꽃과 메꽃은 쌍둥이 수준이다. 무궁화와 부용의 닮음도 뒤지지 않는다. 백합과 나리, 진달래와 철쭉, 개나리와 영춘화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가끔 꽃이 아닌 다른 것을 닮은 꽃이 있다. 그런 꽃의 이름은 당연히 그 닮은 것의 이름을 딴다. 대표적으로는 이팝나무가 있다. 꽃 모양이 잘 지어놓은 쌀밥(이밥)을 연상시켜 그리 부르고 조팝나무는 당연히 튀긴 좁쌀을 연상시켜 그리 부른다. 옥수수 뻥튀기 말이다. 필자가 좋아하는 백접초와 홍접초는 나비를 닮아서 나비 접(蝶) 자를 이름에 썼다.


나비를 닮은 꽃으로는 바위취도 있다. 바위취 군락을 멀리서 보면 마치 하루살이 때가 날아가는 것 같다. 하얀 날개들이 웅성거리며 모여 있는 느낌이다. 가까이 다가서야 그 개별적인 꽃의 모양새가 눈에 들어온다. 바짝 다가서 봐야 그 꽃의 독특한 모양새와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온다. 당연하게도, 다가서기 전까진, 눈에 띄지 않는다.

바위취를 본 것 몇 해 전이다. 날짜를 보니 2022년 5월 27일이다. 그전까지, 난 이 꽃이 있는지도 몰랐다. 딸이 초등학교 입학한 후 한 달에 한두 번은 딸과 지나가는 곳이었는데, 심지어 이곳 앞에서 이십여 년을 살았는데, 비교적 최근에서야 이 꽃을 본 것이다. 그동안 이 꽃은 딸과 내가 앞마당처럼 드나들던 부산시립박물관 안뜰에 숨어 있었다.


그늘 밑, 바위취

바위취는 음지식물이다. 그래서 그날 찍은 꽃 사진엔 닭의장풀도 있다. 둘 다 약간 습하고 그늘진 곳을 터로 잡고 사는 것이다. 바위취는 잎을 먹을 수 있어 약초꾼들한테 사랑을 받고 그들 눈에도 잘 띄는 모양인데 박물관 같이 조경에 신경을 쓰는 곳, 햇볕이 잘 드는 곳에 크고 화려한 나무를 심는 곳에서는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게다가 5월이면 꽃들이 다들 화려한 자태를 자랑할 때 아닌가. 음지에 가만히 피어 있는 하얀 꽃이 눈에 확 들어올 리 없다.


멀리서 보고 궁금해 다가가 자세히 들여다봤을 때, 그 모양이 특이하여 딸을 불러 함께 봤다. 마치 술붓꽃을 처음 봤을 때의 느낌이었다. 사진을 첨부하면 다 해결될 일이지만 그래도 글로 설명할 수 있는데 까지 설명해 보겠다. 아니, 그냥 표지를 보시라. 신기하지 않나. 핑크색 점이 두 개 찍힌 꽃잎 세 개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와 있다. 심지어 그 꽃잎은 흰색에서 핑크색으로 그러데이션이 되어 있다.


자, 그런데 그 꽃잎들과 반대방향으로 잠자리 날개 같은 희고 긴 꽃잎이 두 개 뻗어 있다. 흰색 연미복을 입은 신사의 뒷모습을 닮아 있다. 그 중간에 수술과 암술이 있는 것을 보면 마주 보는 두 잎 다 꽃잎인 것은 확실하다. 그걸 알고 보면 더 신기하다. 굳이 이렇게 다른 색, 다른 모양의 꽃잎을 왜 만든 걸까? 아는 사람이 있으려나. 솔직히 누군가 일부러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인공물인 것 같다. 재주 많은 디자이너의 작품인 것 같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그늘 밑에 있던, 초여름이면 늘 그렇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것이다.


다가오거나 다가서거나

군락은 멀리서도 보인다. 철쭉과 억새처럼 그 모여 있음을 통해 장관을 연출하는 것들이 있다. 그 군락으로 들어가 낱개의 꽃을 보면 군락으로 볼 때보다 감흥이 떨어지는 것도 있다. 모여 있을 때 더 예쁜 것들은 그렇게 모여 있는 것을 선택하는 듯하다. 벚꽃도 그렇고 이팝나무도 그렇다. 매화의 군락 또한 장관이다.


향은 좀 다르다. 홀로 있는 꽃도 그 향을 멀리 보낼 때가 있다. 금목서나 은목서는 모퉁이를 돌기 전부터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고광나무도 마찬가지다. 딸의 등굣길에 새초롬하게 서 있는 라일락도 그렇다. 코가 먼저 킁킁거리며 그 향을 감지한다.


반면, 어떤 꽃은 다가오길 기다린다. 멀리서 보면 안 된다고 한다. 찾아오길 바란다. 지나치지 말고 멈춰 서서 보라고 한다. 그래야 자신을 보여줄 것이라고, 그래야 겨우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잠깐 보지 말고 한참 보라고 한다. 한참을 봐야, 그렇게 오래 들여다봐야 그 진가를 볼 수 있다고 말하는 꽃이 있다.


무심히 지나친다는 말은 생각보다 비정한 말이다. 무심(無心)은 마음이 없다는 말이다. 마음을 두지 않는다는 의미다. 시선도 가고 몸도 그 앞을 지나치는데 마음은 거기 없다는 말이다. 마음이 없으니 시선이 흩어진다. 가 닿지 않는다. 시야에 있지만 시선에 놓이지 않는다. 발견되길 기다리는 아름다움은 무심 끝에 외면당한다.


흔하나 흔치 않은

아름다움은 주관적이다. 꽃도 마찬가지다. 멀리서, 군락처럼, 진한 향처럼 그 색과 모양이 바짝 다가서는 꽃이 있다. 그러나 군락도, 향도 소박하여 그 아름다움이 발견되지 않는 꽃이 있다. 당신이 어떤 꽃을 좋아한다는 말은 할 수 있지만 그 꽃이 가장 아름답다는 말은 할 수는 없는 이유다. 같은 이유로 어떤 꽃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유독 그 꽃에 마음이 뺏겨서 좋아하는 것이다. 어떤 좋아함에는 이유가 있지만 모든 좋아함에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또, 그 이유가 그럴듯해 보이는 이유조차 나를 벗어나 적용될 수 없다. 당신이 그 꽃을 좋아하는 이유와 타인이 그 꽃을 좋아하는 이유가 다른 이유다.


흔한 꽃이다. 바위취도, 닭의장풀도. 흔한 데 그 외양은 범상치 않다. 대부분의 꽃이 원 모양으로 그 잎이 달려 모양을 만든다. 종 모양이든, 방울 모양이든 다들 원통이나 원뿔이 그 모양의 뿌리가 된다. 두 꽃은 그렇지 않다. 다시 말하지만, 자연이 만든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것 같다. 봄날의 술붓꽃의 기이함은 여름날의 바위취와 닭의장풀로 이어진다.


이 기이함은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에겐 보이지 않는다. 가까이 다가서 오래 들여다보라. 꽃들은 종종 그렇게 얘기한다. 어떤 꽃이 여름밤의 폭죽처럼 멀리서도 그 꽃의 아름다움을 풍성히 자랑할 때, 어떤 꽃은 이렇게 조용히 다가오기를 기다린다. 우리 부녀가 박물관의 그 단단하고 웅장한 석벽 밑으로 다가가지 않았더라면 바위취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 아름다움, 작고 기이한 아름다움을.


오랫동안 바라보다

2월 둘째 주, 항암 3차 치료를 위해 입원을 했었다. 입원해 있는 중간, 수요일에 졸업식이 있었는데, 딸은 가발을 쓰고 참석했다. 앞서 썼듯이 자장면을 먹고 다시 병원에 돌아왔다. 이 주, 졸업과 밸런타인데이, 그리고 딸의 생일을 모두 기념하여 손 편지를 주고받기로 했다. 그 내용은 다른 글에 썼다. 토요일에 퇴원을 하고 그다음 날, 일요일 저녁에 편지를 읽었다.


딸은 공부방에 들어가 내 편지를 읽었다. 한글 문서로 딱 한 장만 썼는데, 편지지에 옮기고 보니 네 장이었다. 악필로 쓴 편지를 네 장이나 읽어지려나 괜한 걱정을 했다. 잠시 후 나온 딸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난 맥주를 마시며 부러 모른 척하며 “알아보기 힘든 글씨 읽느라 고생했다.”라고 농담을 던졌다. 딸은 “생각보다 읽기 쉽던데.”하고 말을 받았다. 세수를 하러 욕실에 들어갔다.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 동안 딸의 얼굴을 오래 바라볼 기회가 드물었다. 저녁을 먹을 때만 온 가족이 둘러앉을 뿐이니 더 그랬다. 요즘엔 한참을 본다. 뜯어본다는 말이 더 맞겠다. 삭발한 덕분에 짱구인 머리통부터 해서 긴 목, 넓은 어깨, 긴 팔, 가는 손가락, 내 발을 꼭 닮은 발까지 뜯어본다. 약간 짙은 색의 피부, 크고 맑은 갈색의 눈, 완만히 솟아오른 콧대,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귀, 엄마를 닮은 얇으면서도 도톰한 입술, 살이 빠진 덕에 도드라져 보이는 턱선까지. 그렇게 뜯어본다.


새벽, 병실, 딸

나이트 간호사의 마지막 체크는 새벽 다섯 시 반이다. 체온을 재고 혈압을 재고 링거액을 확인한다. 첫 회 차엔 간호사가 나가면 다시 자려고 애써 봤는데 부질없다는 걸 알았다. 공조기 소리는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처럼 병실 문 밖을 맴돈다. 새벽잠 없는 연로한 환자들이 병실 복도를 운동 삼아 걸을 때 나는 링거 폴대의 작은 바퀴들의 소리가 문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2회 차부턴 본의 아니게 미라클 모닝 비슷한 걸 하고 있다.


집에서 챙겨간 작은 독서등을 켜고 텀블러에 뜨거운 물을 받아온다. 거기에 아내가 특별히 주문해 온 배향 가득한 차의 티백을 넣는다. 우러날 때까지 잠시 기다린 후 한 모금 마시고 북커버의 지퍼를 열어 책을 꺼낸다. 잠이 머물러 있어서 잘 읽히지 않을 줄 알았건만, 의외로 술술 읽힌다.


읽다가 눈이 피곤하면 딸을 본다. 등을 보이고 돌아누워 있으면 등을 본다. 나를 향해 누워 있으면 얼굴을 본다. 반듯이 누워 있으면 옆얼굴을 본다. 그렇게 한참을 보다 보면 창문 밖이 조금씩 환해진다. 블라인드 덕에 딸은 계속 잔다. 아침 식사를 가져온 병원 급식 배선카의 소리와 그 특유의 밥 냄새가 들어온다. 딸은 계속 잔다. 아침밥이 오면 눈을 뜨지만 먹지는 못한다. 내가 대신 먹고 딸에겐 누룽지에 뜨거운 물을 부어준다. 그렇게 아침이 시작된다.


아내가 오기 전, 그렇게 한참을 보고 아내를 보내고 난 뒤, 밤 시간 동안, 딸이 잘 때까지 딸을 본다. 한참을, 그렇게, 오랫동안, 뜯어본다. 책을 보다가 고개를 들어 보고 이런저런 사연이 교차하는 SNS를 보다가 고개를 들어 본다. 고개만 들면 딸이 거기 있으니 좋다. 보고 싶은 순간을 미루지 않고 볼 수 있어 좋다. 이제 항암 치료 한 회차만 남았다. 그것이 다 끝나도 딸을 보는 시간이, 그렇게 오래, 바라볼 수 있는 시간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한가한 아빠니 딸만 한가하면 될 터인데, 보고 싶은 건 아빠니 딸만 보이길 좋아하면 될 터인데, 어찌 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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