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장에서 건진 생각 78
새 달이 되면 신입 회원이 월반하여 들어온다. 7월에도 못 보던 얼굴이 두 명이 있었다. 둘 다 남자인데 한 명은 키가 족히 180센티미터는 넘어 보이는, 풍채가 있는 삼십 대 중반쯤이었고, 한 명은 그만한 키의 호리호리한, 아직 소년의 느낌이 남아 있는 이십 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수요일, 핀 수영을 하는 날, 그 둘은 롱 핀을 들고 왔다. 우리는 작년부터 숏핀을 쓰고 있어서 속도에 차이가 날까 싶어 앞으로 오시라 했지만 그 둘은 사양하며 중간쯤의 자리를 지켰다. 이날, 우리 반의 아재 3인 방 중에서 제일 덩치가 좋고 웃음소리도 호방한 강호동 스타일의 전형적인 부산 “싸나이”가 1번을 섰고, 내가 2번을 섰다. 결론적으로 이 날, 그 두 남자의 속도는 기대 이하였다. 목요일에 그 속도를 제대로 파악하리라 생각했다.
목요일, 체력 훈련을 하는 날, 풍채가 좋은 삼십 대 남자만 나왔다. 웜업이 끝나고 강사가 내 준 첫 번째 세트는 자유형 백 미터 세 개였다. 이 정도 거리면 제법 속도를 내야 한다. 1번엔 전통의 1번 아재, 2번엔 올 초에 올라온 젊은 아빠, 3번엔 내가 섰고, 4번엔 부산 싸나이, 5번에 70대 어르신, 6번에 그 남자가 섰다. 그 뒤로 여자 회원 몇 명이 평소대로 섰다. 여자 회원들은 우리 반에 올라 올 정도의 남자 회원이라면 체력과 기술, 속도를 모두 갖췄으리라 짐작하기 때문에 으레 남자 회원을 자기들 앞에 세운다. 그렇게 정해진 순서로 첫 번째 랩을 돌았다. 1번부터 어르신까지, 착, 착, 착....... 6번이 안 들어온다. 어르신과 6번 사이에 세 사람 정도의 거리가 있다. 당연히 여성 회원들도 그 남자의 뒤에서 천천히 따라온다. 결국, 그는 두 번째 랩부터 맨 뒤로 갔고 강습 시간이 끝날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우리 반에 올라와서 우리의 템포에 적응 못하는 사람의 선택지는 두 개 밖에 없다. 수영장을 거의 수십 년 다니지만 산책 수준의 느린 템포로 수영을 하는 어르신과 막 중급반에서 올라온 여성회원이 주를 이루는 고급 B반으로 내려가던가, 뒷 번에서 꾸준히 함께 운동하면서 서서히 우리의 템포에 적응할만한 체력을 쌓던가. 전자의 선택지는 편하나 실력과 체력이 늘진 않는다. 그 반도 남자 회원이나 젊은 여성 회원이 1번 주자를 맡는데, 속도가 빠르거나 출발의 템포가 빠르면 할머니들의 원성을 듣기 때문이다. 후자의 선택지는 처음엔 괴로우나 최소 3개월, 늦어도 반년 정도면 체력이 느는 게 느껴진다. 템포에 적응이 된다. 올라간 심박수가 빠르게 진정되는 게 느껴진다. 수영을 잘하고 싶다면 견뎌야 하는 것이다. 적응해야 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바뀌고 한 달 넘게 지켜보면서, 앞으로 공직사회는, 그리고 각 지자체장은 일과 의사결정의 속도의 적응이 관건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대통령과 그 행정부의 일하는 속도와 방향을 따라잡지 못하는 공무원과 지자체는 순식간에 뒤처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반면에 같은 방향으로 같은 속도로 가는 공무원이나 지자체는 임기 동안에 엄청나게 성장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생각해 보니, 참 묘하게도, 소위 진보적이고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좌파라 할 수 있는 정당에서 배출된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쳐지는 사람을 기다려주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이 대통령은 그럴 시간이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미 적응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적응한 지역과 그렇지 못한 지역의 차이가 발생하고 있는 것 같다. 정치적 성향이 다른 야당 출신의 울산 시장은 대통령의 성향을 파악해 울산에 필요한 일과 예산을 구체적으로 준비해 와 대통령에게 솔직하게 부탁했다. 무안 군수 또한 자기 지역과 전남, 광주와의 갈등, 그 핵심을 정확하고 간략하게 요약해 와 발표했고 기대하는 바를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국무회의 때 꼼꼼히 준비해 와 제대로 발표를 하고 대통령의 질문에 조리 있게 대답한 농림부 장관은 유임됐다. 성과와 과제 보고를 자청하여 효과적으로 “셀프 홍보”한 식약처장도 유임됐다. 한마디로 자기 차례 기다리고, 아랫사람한테 발표 자료 맡겨 놓고, 최대한 눈에 안 띄게 처신하여 안전하게 임기를 다 채우고 퇴직하겠다는 사람에겐 앞으로의 5년이 힘들 것 같다.
여기에 적응 못한 도시들은 뒤처질 것이다. 인구감소, 고령화로 인한 지방 소멸을 목전에 둔 영호남의 많은 지자체들은 이 5년이 분수령이 될지 모른다. 하여 이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지역의 리더들은 시민들의 비판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이미 해운대구의회에서 해수부 이전 결의안이 부결돼서 시민들의 원성을 자아내고 있다. 대통령 후보 시절, 부산을 방문한 대통령과 각을 세웠던 박형준 부산 시장도 입장이 곤란하게 됐다. 글로벌허브도시 특별법과 산업 은행 이전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하며 대통령 후보가 제시한 해수부 이전과 북극항로 개척 거점 도시 공약을 평가 절하했던 것이 불과 몇 달 전인데, 지금은 부산 지역 16개 구군에 해수부가 들어갈 빈 건물을 찾아달라고 공문을 보냈기 때문이다. 이 공문을 받은 각 구청들은 그야말로 빛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 강서구, 영도구, 중구 등이 나서고 있으며 심지어 남구는 부경대학교와 손잡고 용당 캠퍼스를 통째로 제시하며 유치에 나서고 있다.
우리나라의 일의 속도는 세계 1위다. 그 명성의 그늘도 존재했다. 날림과 졸속이라는 불명예가 뒤따랐다. 땜질처방, 미봉책이라는 수식어도 늘 붙어 다녔다. 개발에 치중하고 이벤트에 열중하는 시대를 살기도 했다. 그럴싸한 MOU 체결만 서두르고 정작 일의 첫 삽을 못 뜬 경우도 많았다. 부실 검증, 부실 공사, 사업성의 예측 실패가 빈번했다. 속도만큼 가고자 하는 방향도 중요하다. 일의 질과 결과도 중요하다. 지금은 진용을 갖추는, 전열을 가다듬는 속도가 빠를 뿐, 실제로 일 그 자체의 속도가 빠른 지도 지켜봐야 한다. 그러나 분명한 건 지금의 속도를 외면하면, 이 방향에 편승하지 못하면 도태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각 지역과 공무원들이 가져야만 할 것이다. 관례대로, 구태의연하게, 복지부동하며 시간을 죽이고 있기로 마음먹는 순간, 그야말로 영원히 B반에 머무르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