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끝에 서다

삶과 죽음에 대한 우리의 선택

by 사나래

살아간다는 것은 선택의 연속이다.

삶과 죽음을 직접적으로 선택할 수는 없지만

매일 매 순간 은연중에 했던 우리의 선택이 결국은 삶이냐 죽음이냐를 결정하는 중차대한 문제였던 것이다. 결국 그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날까 조금 더 누워 있을까를 시작으로,

몸에 이로운 것을 먹을 것인가 조금 해롭더라고 입맛을 따를 것인가,

가까운 거리는 운동하는 셈 치고 걸을 것인지 귀찮으니 3보 이상 승차?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할 것인지 오늘은 바쁘니 패스?

급기야는 하나님을 따를 것이냐 사탄을 따를 것이냐에 이르게 된다.

작정하고 사탄을 따르는 사람은 결단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향한 선택을 등한히 하는 것이 아주 쉽게 사탄에게 정복당한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내 주인이 누구인지


성경에는 귀신에 대한 이야기가 여럿 나온다.

그중 나를 가장 섬뜩하게 만드는 귀신 이야기는 일곱 귀신에 대한 것이다.

귀신을 쫓아내고 빈 집을 아주 깨끗하게 소제를 하며 다시는 귀신이 못 들어오게 하려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나갔던 귀신이 깨끗이 소제된 집으로 저보다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온 것이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우여곡절 끝에 귀신을 내보내고 집도 깨끗이 청소해 놓았는데?

다시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나름 최선을 다해 과거를 청산했다고 믿었다.

그런데 문제는 깨끗하게 소제하고 집을 비워둔 것이 화근이었다.

비워둔 채 방심하고 등한히 한 것이다.

귀신을 몰아내고 하나님을 모셔 들였어야 했다.

인간은 그 누구도 사탄의 지배를 쉽사리 벗어날 수 없다.

이미 사탄도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우리 인생이 아닌가.


날마다 내 주인이 누구인지 방점을 찍어둬야 하는데

그래서 하나님이 거하실 자리를 마련해야 하는데 바쁘다는 이유로 패스 했던 그 아침과,

말씀을 귓전으로 넘기며 드라마 신을 모셔 들였던 그 저녁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날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않으면서 당당히 밀고 들어오는 일곱 귀신을 저항한다는 것은 불가하다.


“우리가 하늘의 능력에 협력하지 않으면 사탄이 마음을 점령하여 자신의 거처로 삼을 것이다. 악에 대한 유일의 방어는 그분의 의를 믿음으로써 그리스도께서 마음속에 내재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과 산 연결을 맺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자아 사랑과 자아 방종과 죄에 대한 유혹의 부정한 영향에 대항할 수 없다.”(DA, 324)


그러나 적어도 나만큼은 그렇지 않다고 믿고 사는 어리석은 인생이다.


우리의 기다림의 끝


세상에서 가장 큰 운대를 거머쥐었던 자들은 바로 예수의 형제들이었다.

예수와 함께 먹고 마시고 자고 생활했던 천운을 감지하지 못했던 사람들,

짧은 측량 줄로 세상의 구세주를 차 버렸던 사람들,

예수를 부끄럽게 여기며 그러고도 메시아를 끈질기게 기다렸던 사람들

그러나 그들은 눈앞에 메시아를 보고도 눈멀었던 형제들이었다.

격려와 사랑으로 예수를 품었어야 할 그들이 나사로의 집으로 외로운 예수를 밀어내면서까지

메시아를 기다리던 어리석은 사람들이었다.

예수께서 걸어가신 고난의 마지막 길에 위로와 힘이 되어 주었어야 할 사람들이었다.

행복하게 사명을 감당하실 수 있도록 응원의 박수를 보냈어야 할 시간이 그들에게서 안타깝게 지나갔다.

그들의 기다림의 끝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그러는 우리의 기다림의 끝에는 과연 예수님이 계실까?

기다림의 주체를 잃어버리고도 모른 채 살고 있다.

세상의 귀신을 밀어낸 자리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는다면

사탄이 우리의 눈과 귀와 생각을 가로막는 것을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매일 사탄을 섬기면서도
우리의 기다림의 끝에
메시아가 서 계셔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미련한 인생인 것이다.

매일 매 순간, 날마다 새롭게 우리의 기다림의 끝을 기억해야 한다.




사진-mario-caruso-1123112-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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