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선언

사람은 비대면, 예수님과는 대면

by 사나래

모든 기독교인이 다 그런 거는 아닙니다

내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일도 나 없이 거뜬히 해내는 것을 보면 마음이 썩 좋지는 않다. 우월감이 과하면 착각으로 매듭지어진다. 자기 과신의 도를 넘어서는 거다. 워워.

이제 그만하면 되었다. 네가 아니어도 된다. 하나님의 사업에는 꼭 ‘나’ 여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아니더라도 하나님과 마음을 합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 일을 할 수 있다. 가난한 마음만 있으면 된다. 나머지는 채워 주시니까. 이 못난 나에게 능력의 옷을 입혀 감당케 하시니 굳이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그러지 말라는 법도 없다. 은혜의 비는 누구에게나 어디에나 공평하게 내린다. 나에게만 특별히 많은 은혜의 비를 원한다면 내가 특별히 하나님과 마음을 맞추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집착, 애착 이런 것들... 보통 문제가 아니다. 아무리 내가 있고 싶은 곳이어도 내 자리가 아니라면 다른 내 자리를 내어주시고, 내가 꼭 필요한 다른 곳으로 부르실 그분의 큰 그림을 못 믿고 조바심 낸다.

가라시는 곳으로 가는 삶, 오라시는 곳으로 오는 인생이 아직은 힘들다.

스스로 자리를 만들려고 수를 써야 하니 참 힘들고 어렵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노력으로 자르고 닦고 아름답게 하지만 그들이 산 돌이 될 수 없는 이유는 그리스도와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생명 없이 우리는 유혹의 폭풍을 물리칠 수 없다.”(DA, 599)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해서 다 잘하고 있는 걸까?

하나님이 점지해 주신 자리에 있다고 해서 다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일까?

무의식 중에 방해도 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리스도와 연결되지 않았던 많은 순간, 권위와 힘으로 했을 것이다.

그러고도 그런 줄 몰랐을 것이다.


우리는 하루에 몇 번이나 그리스도와 연결이 될까.

그동안 생활의 분주함을 이유로 간헐적 연결이었다면,

코로나로 비대면인 지금은 예수님과의 연결이 가능하지 않을는지...


대면 스케줄이 취소된 만큼
사람과는 비대면 하고 예수님과는 대면하고 싶다.

어떤 분이 내게 “글을 참 매웁게 씁니다.” 하신다.

곰곰 생각해 보았다.

매웁게 쓴다는 것이 무슨 뜻일지를... 매웁게 잘 쓴다는 것인지, 뭐 그딴 글을 쓴다는 것인지... 아마도 찔림이 있는 글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반성했다. 또 생각했다. 가끔 인사이트가 있는 글이라고 공감의 의견을 보내주시는 분들 덕에 나는 조금 부드러워지려 노력하며 글을 또 쓴다.


이제는 코로나가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들 한다.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길어야 3~4개월일 줄 알았다. 그동안 한 질병으로 해를 넘기는 경험이 없었으니까 곧 일상으로 회복될 줄 알았다. 다들 "코로나만 끝나면, 내년에는, 이번 겨울에는..." 하면서 하고 싶은 일을 미루어왔다. 그러는 사이 지인의 결혼식이 몇 건 있었다. 참석 않는 것이 애국하는 길이라 여겼지만 꼭 가야 하는 결혼식도 두어 건 있었다. 늘 새로운 국면으로 이어졌다. 새로운 문화 체험이라고 해야 할까? 결혼식뿐 아니라 사람들이 만나는 많은 만남의 형식이 새롭다. 처음 낯설던 많은 경우가 익숙해지고 있다.

방한용이었던 상식적인 마스크의 쓰임새는 이제 잊힌 지 오래다. 감기에나 걸려야 사용하는 물건이었던 마스크를 1년 내내 쓰는 생활의 불편함이 이제는 익숙하다. 마스크의 쓰임새는 생존을 위한 것으로 바뀌었다.

폭염의 그 숨 막히는 날에도 우리는 살기 위해 그리고 타인의 눈을 의식하며 마스크를 벗을 수 없었다.

마스크를 안 쓰면 벌금까지 부과되니 답답하더라도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이 전례 없는 상황을 적응하기까지 온 세계가 꼬박 1년을 지나 2년이 걸리고 있다.

변이 바이러스까지 출현하는 지금은 언제 마스크를 벗을 수 있을지 기대하기 어렵다.

코로나와 여타의 바이러스가 바꾸어 놓은 일상은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계획된 인생을 살아갈 수가 없게 만들었다. 모든 것이 흔들리고 있으며 생존의 위협이 그 강도를 높이며 조여 들어온다.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말들이 이제 납득이 된다.


2020년을 시작으로 모두가 얼굴을 잃어버린 나날을 보내고 있다. 아무리 화장을 해도 반 이상이 가려진다.

차라리 화장을 하지 않고 맨 얼굴로 집을 나서는 날이 많다.

마스크만 있으면 그럭저럭 봐줄 만... 적당히 적응이 된 것이다.

마스크로는 얼굴만 가려야 한다. 코로나의 시작과 함께 유난히도 기독교인들이 지탄받았던 기억들을 떠올려 보니 아마도 양심까지 가린 사람들이 많았던 듯싶다.

그리스도와 연결되지 않는 시간 속에서 양심을 챙기지 않고 지나간 시간들을 반성한다.

예기치 않은 천재지변이 빈번히 일어나는 이 두려움의 세상 끝에서 두려움의 대상을 분별하여 알려야 할 기독교인들이 지탄받았다. 뉴스를 통해서 보이는 실상은 지탄받아 마땅한 경우들이었다. 수많은 기독교인의 망신살을 목도하며 복음을 전하려는 의지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희망 없는 세상에 참 희망의 의미는 과연 어찌 전하고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


얼굴은 잃어버리더라도 기독교인으로서 양심만큼은 첫째로 삼고 싶다.



사진-artem-kovalev-86365-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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