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사람은 변화되기 매우 힘들다.
가끔 “저 사람 변했어요.” “사람이 달라졌어요.” 하는 것은
일시적인 현상이거나
뭔가 그래야 하는 두려운 배경이 있어서다.
가령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큰 손해 볼 뭔가가 있거나, 인간의 힘으로 제어가 불가능한 일신상의 변화로 정말 뉘우칠 수밖에 없는 바로 그런 때이다. 그런 이유 말고 변했다면 십중 팔구는 성령의 바람이 불어와 그 사람에게 스며든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인품을 가졌더라도 사람이 스스로 변화되기는 어렵다.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어떤 변화도 참된 변화는 불가능이다.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제자들은 멘붕상태가 되어버렸다. 예수님이 그토록부활할 것이라고,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건만, 사두개인들의 교리에 젖은 제자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거다. 그러니 예수님이 부활을 하셨어도 믿지 못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오히려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적어도 그들은 그분의 부활을 두려워하며 예수님의 시체를 감시했잖은가.
수없이 부활을 배웠던 제자들을 포함한 예수님 언저리의 사람들은 믿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을 예상이라도 한 것이다. 돌아가신 사실에만 매여 슬픔을 억제하지 못한 이들은 다름아닌 제자들과 마리아들, 그리고 가족이었다.
다시 사심을 믿는다는 것과 믿지 않는다는 것은 천지차이다. 그것은 이 땅의 가치를 초월할 수 있게 만들어 주고 공간의 제약성마저도 뛰어넘게 해 준다. 자유롭지 않은 몸에 자유를 주고 억압된 생각을 놓아준다. 예수께서 돌아가신 순간에서 부활하시는 순간까지 기쁨으로 기다릴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나 그 모든 시간을 슬픔으로 가득 채우면서 믿지 못한 자들은 다름 아닌 예수님을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을 그토록 사랑했던 마리아도
예수님의 빈 무덤가에서 울기만 했다.
눈물이 앞을 가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눈앞에서 천사가 나타났고 기별을 주었지만 자기 설움이 가득하면 기적이 일어나도 분간을 못하는 법이다. “그분은 저희 곁에 가까이 계시나 눈물로 흐려진 저들의 눈이 그분을 분별하지 못한다. 그분이 그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나 저희는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DA 794).
우리는 때때로 빈 무덤을 바라보며 슬퍼한다.
나처럼 절망적인 사람은 다시없다고 생각하며
희망도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자처럼 슬퍼한다.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세상에 희망을 잃고 넋이 나갔던 제자들같이 우리도 그런다. 우리가 어찌 이처럼 믿음 없을 수 있는가. 우리가 어찌 돌아가신 예수님을 다시 살아나지 못하게 할 수 있는가 말이다.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은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거둘 수 있고 희망 없는 우리의 삶이 감사로 변할 수 있는 이유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다름 아닌 바로 이것이어야 한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를 우리는 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을 알자 힘써 하나님을 알자”라고 한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 곁에서 함께 걸어주심을 알아차렸다면 그분을 모셔 들여야 한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이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 배고픔도 잊어버리고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이것이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들이 해야 할 행동이다.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되돌아가는 길은 예수님과 동행하니 그 길이 평탄했을까? 결코 아니었음이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그들은 길을 잃었다가 다시 찾기도 하면서 때로는 뛰고 때로는 비틀거리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저들의 여정 내내 눈에 보이지 않는 동행자가 저희 곁에 가까이 계셨다”(DA 801).
사진-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