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가의 발레 작품을 보면
발레 공연이 생각난다.
러시아 작곡가들은 대부분 발레 음악을 작곡했다.
러시아는 발레의 역사가 깊다. 그래서 유럽의 작곡가들에 비해서 러시아의 작곡가들이 발레 음악 작품을 많이 작곡했다.
그중에서 특히 차이콥스키의 발레 음악은 최고이다.
호두까기 인형,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공주 등
3대 발레곡에는 다 차이콥스키의 작품이다.
러시아 작곡가이며 지휘자이다.
발레곡 호두까기 인형,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공주, 비창 교향곡,
피아노 협주곡, 바이올린 협주곡, 오페라 에브게니 오네긴 등
셀 수 없이 많은 명곡, 아니 모든 곡이 명곡이다.
러시아 작곡가들은 대부분이 투잡이었다.
러시아 제국의 표트르 대제가 러시아를 세우기 위해서
유럽의 모든 것을 따라 하기 전까지는 유럽의 음악 같은 음악이 아니었고,
러시아 자기들의 음악이 있었다.
그때까지 러시아에는 음악원이 없었다.
작곡가들은 자신들의 직업을 가지고 있고,
쉬는 날 또는 저녁에만 작곡을 했었다.
보로딘은 화학자로, 무소륵스키는 군인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일을 하면서도 꾸준히 음악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틈이 날 때마다 작곡을 하는 것이 참 멋있다.
차이콥스키 또한 법률학교를 졸업하고, 법무부 서기관을 지냈다.
그러면서 작곡을 배우고, 작곡을 하고, 음악에 대한 열정을 더욱더 키워나갔다.
대단한 예술 후원자, 폰 메크 부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녀로부터 후원을 14년 동안 6000 루블을 받게 되면서
음악원 교수직마저 그만두었다.
당시의 6000 루블은 러시아 하급 공무원 봉급의 10배가 되는 금액이다.
단 조건은 서로 만나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편지를 1200 통 가까이 주고받았다.
서로의 예술 동반자이자, 친구이자, 위로자였다.
두 사람이 다 러시아의 셀럽이라서 모임이나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겠지만
서로 약속해서 만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폰 메크 부인은 차이콥스키뿐만 아니라 드뷔시, 리스트, 비예나브스키 등 음악가들을 많이 후원했었다.
차이콥스키는 동성애자였다.
물론 차이콥스키는 결혼을 했었다.
제자였던 밀류코바가 결혼해 주지 않으면 죽는다고 협박을 하기도 했고,
동성애자인 사실을 숨길 수도 있어서 결혼을 했다가 일찍 끝이 났다.
차이콥스키의 사인은 '콜레라'이다.
그러나 콜레라는 전염병이라서 장례식을 해서도 안되고, 시체를 만져서는 안 된다.
차이콥스키는 장례식을 거창하게 하였고, 손님들이 차이콥스키 시체를 안고 키스를 하고, 만지고 하였다.
그 말은 '콜레라'가 아닐 거라는 이야기이다.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자살을 종용 받았다는 설이 있다.
차이콥스키는 법대 출신이고 법무부 서기관을 지냈으니,
그의 동창들, 그리고 동료들은 러시아의 리더들이다.
그런 그들이 동성애자 동창을 그냥 둘리 없다는 것이다.
그런 삶을 살았던 차이콥스키지만, 아름다운 발레 음악을 작곡했다.
크리스마스만 되면 공연이 되는 '호두까기 인형'.
발레의 배경이 크리스마스이다.
크리스마스이브에 클라라는 호두까기 인형을 선물로 받았다.
클라라는 호두까기 인형이 너무 좋아서 안고 잠이 들고,
호두까기 인형과 함께 생쥐와 전쟁을 하기도 하고,
세계 여러 나라의 춤을 보기도 하고,
왈츠를 추기도 하는 장면들이 참 볼거리가 많은 발레 공연이다.
그중에서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호두까기 인형'을 추천한다.
전체를 다 보면 더 좋고,
서곡 그리고 중국춤, 트레팍, 꽃의 왈츠를 보면 참 좋다.
서곡 00:00 -
중국춤, 트레팍 57:51 - 1:00:15
꽃의 왈츠 1:06:00 -
중국춤을 추천하는 것은 차이콥스키가 보는 또는 경험한 중국 음악이 어떤 것인지 볼 수 있어서이다.
내 귀에는 하나도 중국스럽지 않은데,
차이콥스키는 이게 중국스럽다고 생각했나 보다.
https://youtu.be/RTd7YUUh8Jc?si=nWqcRRConP1AfE7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