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집을 발매한 직후 코로나가 터졌다.
한달 넘게 준비중이던 나의 쇼케이스는 취소되고, 내 계획은 틀어졌다. 쇼케이스를 시작으로 당분간은 공연을 하며 내 음악을 알리고 천천히 2집 작업을 시작 하고자 했으나 코로나로 인해 모든 공연이 취소 되었다. 잠시 멍해졌지만 나는 곧 씩씩하게 다음스텝을 준비했다.
팬시 스튜디오 시즌2와 함께 2집 데모작업을 시작했다. 동화와 심리를 버무린 야심찬 프로젝트였다. 1집 작업을 통해 나의 내면에서 감정의 덩어리들을 발견한 나는 그것들을 채굴하고 해체함으로써 묵은 감정을 해소하는데 성공한 것 같았다. 내적성공의 경험으로 자신만만해진 나는 이제 더 강력한 장비를 챙겨 심연으로 돌진했다.
겨울과 봄에 걸쳐 엄청난 양의 텍스트를 읽었다. 프로이트와 융을 공부하고, 민담과 동화를 팠다. 동화 속 인물들의 심리를 분석한 두꺼운 학술서와 동화의 상징에 관한 논문들을 찾아 읽었다. 박사학위라도 딸 기세였다. 공부와 창작을 병행하며 인풋과 아웃풋의 현란한 퐁당퐁당 테크닉을 구사하며 데모음악과 작곡컨텐츠는 무서운 속도로 쏟아졌다. 그렇게 파죽지세로 일곱개의 데모를 만든 시점에 나는 불현듯 음악을 그만뒀다.
심연에 숨겨진 나를 마주하는 일은 위험한 일이었다. 1집 작업을 통해 많은 걸 깨닫고 해결 했다고 생각했다. 이제 내 인생의 모든 질문에 답한 것 같았고 더 이상의 방황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내 인생의 미스테리와 가장 중요한 질문은 훨씬 깊은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겉핥기 정도로 보일 지경인 1집의 내면모험과는 레벨이 다른 거칠고 모호한 여정. 무의식의 단계였다.
심연에 숨겨진 곳으로 들어갈수록 악취가 가득했다. 너무 오래 억제된, 해결되지 못한 마음들이 거기서 썩어가고 있었다. 불안정한 애착, 결핍으로부터 온 인정중독,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인지부조화, 내적갈등의 합리화, 어머니를 향한 분노와 회피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통제하는 거대한 초자아가 있었다.
요리조리 녀석을 피해 용케 도달한 심연의 끝에서 작게 웅크린 내면아이를 만났다. 깊이 봉인되어 있던, 은폐된 나를 발견한 것이다.
두려웠다.
음악은 나를 너무 깊은 곳으로 이끌었고 그때 난 그걸 감당할 수 없었다. 그녀를 발견한 것만으로 난 탈탈 털렸다. 눈이 마주친 순간 부리나케 도망쳤다. 그 경험을 통해 불현듯 깨달았다. 내가 음악을 통해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평생에 걸쳐 사라지지 않는 이 공허와 기묘한 기시감은 뭔지, 난 뭘 기다리고 있는지, 모든 게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심연에서 진짜 나를 만났고 부정하고 싶어서 도망쳤습니다."
라고 제법 깔끔하게 정리했지만, 당시의 나로써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저 갑자기 음악을 만들 수 없게 되었다는, 아니, 만들고 싶지 않다는 감각만이 남았다. 야심차게 준비하던 동화x심리 프로젝트는 허무하게 중단됐다. 나는 그것을 번아웃이라고 판단했고, 극복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나 자신을 협박 해보고 설득 해보고 회유 해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진짜 나를 부정하기 위한 줄행랑인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어리둥절 하고 괴로운 나날이 시작 되었다. 레슨이 너무 많아서일지도 몰라, 라며 레슨을 줄였고, 너무 막 살아서 그런 지도 몰라, 라며 바른 생활을 시작했다.
덕분에 금연에 성공했다. 좋은 음식을 챙겨 먹고 두피케어와 피부 관리도 끊었다. 체력 부족 때문일 지도 몰라, 라며 한약을 지어 먹고 미루기만 했던 운동도 시작했다.하지만 여름이 지나도 번아웃은 끝날 줄을 몰랐다.
'도쿄 올림픽'에 빠져 한달을 통으로 날렸다. 드라마 '악의 꽃'과 '우리집 준호'를 덕질했다. 일상 브이로그를 해보겠다며 촬영과 편집을 하다 엎었다. 급기야 사업자를 등록해서 스마트 스토어도 열었다. 시작부터 매출이 좋았기 때문에 '예술가가 아니라 사업가였나?!' 라는 희망회로를 돌리며 잠시 신이 났기도 했지만 첫CS에서 좌절하여 두 달 만에 그만 뒀다.
어떻게서든 '음악을 제외한 무언가'를 통해 기쁨이나 성취감 같은 만족감을 얻고자하는 몸부림이었다. 그 모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렇게 일 년이 흘렀지만 다시 음악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죄책감은 쌓여 가고 나날이 괴로웠다.
그리고 갑자기 3년 동안 미룬 결혼식을 하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