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아빠 편 했으니까, 남은 생은 엄마 편 할려고."
부모님의 '서류상' 이혼 이후, 2년 넘게 아버지에게 연락하지 않고 있다. 이유를 묻는 친구에게 난 이제 엄마 편이라고 최대한 유치하게 답했다.
평생 어머니를 미워했다. 어머니의 무력함과 무가치함을 목격한 딸은 그녀가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느라 그녀를 사랑할 기회를 잃어왔다. 나는 그녀의 우울과 그녀의 종교에의 의존과 빤히 들여다 보이는 그녀의 기다림을 죽도록 싫어했다. 학창시절 내내 그녀와 싸웠고, 성인이 되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독립한 계기가 되었다. 남동생이 군대를 가서 다시 어머니와 살아야 했던 몇년은 끔찍 할 정도였다. 나는 아버지를 너무 많이 닮아서 어머니와 천적인 게 분명하다고 결론 내렸다. 최대한 그녀와 떨어져 사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편은 툭하면 내가 엄마랑 똑같다고 말했다. 그 말을 너무 싫어 한다는 걸 알면서 늘 놀리듯이 말했다. 나는 매번 발끈했지만 뭔가 마음 한구석에서는 동의하고 있었다. 내 인생에 '팬시'가 등장한 순간 이었을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조금씩 의심했다. 나는 그녀와 닮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녀와 닮고 싶지 않았던 것이리라.
어머니와 아버지의 서류상 이혼을 준비 하면서 나도 어머니도 많이 힘들었다. 우리 모두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이미 끝난 사이다. 이제 와서 뒤늦게 서류를 정리하는 것 뿐이고 그것이 각자 노후를 준비하는데 합리적인 길이다. 하지만 우리는 괴로웠다. 이혼 절차에 관련하여 만날때마다 큰 소리가 났다. 남동생과 남편도 중간에서 고생을 많이 했다. 하지만 어찌어찌 그 산을 넘고 최종 등기를 받았을 때 어머니, 남동생, 남편 그리고 나는 끈끈한 전우애 같은 것이 생겼다.
이혼 과정이 다 마무리 되고 우리는 어머니의 작은 집에 모였다. 주택 연금과 관련해서 처리할 일들이 조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고생했다고 잘했다고 서로를 위로하고 칭찬했다. 그리고 평생 아버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던 어머니의 입에서 '그래도 내 인생에 남자라고는 그거 하나밖에 없는데 좀 그랬다' 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왔을 때는 모두 집이 떠나가라 껄껄껄 웃었다. 너무 웃겨서인지 눈물이 찔끔 났다. 속이 후련했다.
그 이후로 엄마와 나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