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 바이브

대둔산 단풍 막차

by 은도

좋은 책을 읽으면 글이 쓰고 싶어진다. 미약한 기쁨과 흐릿한 슬픔까지 꼭 붙들고 싶어진다. 오늘 읽은 좋은 책은 <동네 바이브>. 함께 책을 만드는 동료가 추천한 책이다. 저자는 자신이 걷고 보고 다녀간 동네들을 다정한 감탄으로 재잘거린다. 그러자 내가 사는 완주에 대해서도 한껏 자랑하고 애정을 떠들고 싶어졌다.


완주에 온 지 한 달이 조금 지났다. 그 사이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다. 어제는 노랑집 친구들과 대둔산으로 등산을 다녀왔다. 올해 처음으로 엉따를 켜고 운전했다. 대둔산은 완주의 동쪽 끄트머리에 있는 산으로, 내가 살고 있는 봉동에서 차를 타고 40분가량 가야 한다. 40분이지만 가는 길은 전혀 지루하지 않다. 산으로 둘러싸인 소담한 마을들과 붉은 나무들에 감탄하고, 더 추워지기 전에 더 자주 산책을 하러 다니자며 친구와 의기투합하고, 아기자기한 단풍나무를 곁눈질하며 차를 몰다 보면 어느새 대둔산이다.


따듯한 라떼를 한 잔 마시고 등산을 시작했다. 등산이라 하기엔 멋쩍게, 케이블카를 타고 편하게 산을 가로질러 올랐다. 바위산이 이토록 멋지다는 걸 처음 알았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조금 걸어 올라가면 구름 다리와 삼선 계단이 있다. 흔들거리는 구름다리까지는 괜찮았다. 그러나 안전장치 없이 바위와 바위 사이를 이은 경사 높은 계단을 오를 때에는 다리에 힘이 풀릴까 봐 심장이 으슬으슬했다. 차가운 난간을 온 힘을 주어 잡고 어서 이 고행이 끝나기만을 바라며 앞만 보며 계단을 올랐다. 오직 한 사람만 오를 수 있는 좁은 계단은 빠꾸가 불가능했다. 머릿속으로 자꾸 상상하게 되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면. 지금 뒤를 돌아본다면. 균형을 잃는다면. 한 사람이 미끄러지면 지금 계단을 오르고 있는 모든 이들이 아래로 떨어지겠지. 스키장 리프트 아래에는 그물이라도 있는데. 여기는 그런 것도 없다. 스키장만큼 높은데도 말이다. 스릴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은 삼선 계단을 올라 보아야 한다. 자신이 진정으로 스릴을 즐기는 사람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아니었다. 무서워서 뒤를 쳐다볼 엄두도 안 났다.


계단을 다 오른 후 친구들과 한참 데크에 주저 앉아 있었다. 모두 입을 모아 너무 무서웠다고 말하며 진이 빠진 모양새였는데 한 친구만은 아쉬워했다. 왜 뒤를 보지 않았어? 그 풍경이 얼마나 멋있는데. 잎들이 바람을 타고 위로 빙글빙글 떠오르고, 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저 멀리 마을들이 보이는 게 정말 너무너무 멋있었는데. 나는 멈춰서 보고 싶었는데 다들 뒤도 안 보고 올라가기만 해.


그런 말을 하고 있을 때 아래에서 작은 잎사귀들이 솟구쳤다. 손톱보다 조금 더 큰 크기의 바람개비 모양 잎이었다. 저거 은행나무 씨앗이래. 잎이든 씨앗이든 공중에서는 낙하하는 것만이 당연한 줄 알았는데 바람을 타고 떠오르는 씨앗도 있다니, 생경하고 낯선 아름다움이었다. 빙그르르 떠오르며 은빛으로 빛나는 씨앗들은 경쾌하고 짓궂은 장난꾸러기들 같았다. 감탄하다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검은 새 한 마리가 공중을 활강하는 모습이 보였다. 바람을 타고 매끄러운 곡선을 그리면서. 송골매다! 한 친구가 외쳤다. “맹금류는 위험한 거 아냐?” 하고 되묻자 “사실 몰라. 송골매 하면 멋있잖아.” 라며 베시시 웃었다. 모두들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정상을 향해 본격적으로 등산해야 했다. 자연이 만든 바위 계단을 한없이 오르며 헉헉댔다. 너른 바위가 있는 곳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있던 부부가 우리를 보더니 샤인머스캣을 두 알씩 건네주었다. 중간 지점을 통과한 상 같았다. 샤인머스캣을 우물거리며 우리도 근처에 앉았다. 시야가 탁 트여 산 아래의 전경이 보였다. 등산을 좋아하는 친구는 등산하기 재미있는 산이 있고 재미없는 산이 있다고 말했다. 중간중간 풍경을 볼 수 있는 산은 재미있는 산, 나무로 빽빽해 바깥 풍경이 보이지 않는 산은 재미없는 산. 그래서 대둔산은 재미있는 산이라고. 그러면서 말을 이었다.


“난 정상 가는 것보다 가는 길에 보는 풍경을 즐기는 게 좋아서 등산을 하는 거야. 그래서 언제든 내려가도 상관없어.”

이에 다른 친구가 대답했다.

“나는 정상을 찍어야 해. 그동안의 고생이 정상에서는 보람이 되니까.”

나도 대꾸했다.

“맞아, 나도 어쩐지 정상을 안 찍고 가면 찝찝해서 어떻게든 정상까지 가.”

“신기하다, 그런 마음.”


정상에 안 가도 된다는 친구가 더 신기했다. 그 태도가 묘하게 느껴졌다. 나에게 등산은 정상에 오르기 위한 고된 과정이었다. 발 아래만 보며 헉헉거리며 정상만을 향해 올랐다. 그렇게 꾸역꾸역 오른 정상에서야 눈을 돌려 그 풍경을 감상했다. 아, 나는 정상이라는 목표 외에는 눈을 잘 돌리지 못하는 사람이었구나. 정상으로 오르는 길목에 멈추어 풍경을 바라 보는 것, 언제든 내려가도 괜찮은 마음으로 오늘 본 풍경에 만족하는 것. 나는 그런 태도를 갖고 싶어서 지역으로 내려온 게 아니었나. 서울의 빠른 속도가 힘에 부쳐서. 내가 맞닥뜨리는 매 순간을 보듬고 아끼는 태도를 익히고 싶어서.


잎이 떨어져 바위가 드러난 산의 정경을 보며 이 계절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충분히 누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조금만 미루어도 금세 지나가 버리는 이 아름다움. 할 수 있는 건 당장 내 앞에 놓인 진풍경을 오래 바라보는 것. 단풍 막차를 타고 내려오는 길에는 생밤을 사서 돌아왔다. 목표가 아니라 과정을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을 갖고 싶다고 생각한 건 며칠 전 보늬밤을 만들며 했던 생각이기도 한데... 그 얘기는 다음에. 대둔산은 눈이 내린 날 다시 가기로 했다.






대둔산 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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