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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으네제인장 Apr 18. 2023

아뿔싸! 내 버선


길을 걷거나 차를 타고 지나다 보면 화단마다 어렵지 않게 진분홍빛, 다홍빛, 그리고 하얀빛의 철쭉을 볼 수 있다. 오늘은 오랜만에 활짝 핀 진분홍 철쭉을 닮은 속치마와 하얀 겉치마를 챙겨 왔다. 새 옷은 아니지만 새로운 분들이 보기에는 낯선 치마다 보니 옷을 갈아입는 동안 말을 건네는 분들이 많다. 색깔이 예쁘다, 디자인이 독특하다, 어디서 샀느냐 등, 나는 그저 선생님께 새 연습복이 필요하다는 말을 꺼내고 갖다 주시는 대로 입는 거라 시원찮은 답변 밖에 해드릴 수 없지만 그래도 내가 입은 치마에 관심을 가져주면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옷을 갈아입고, 옷에 관한 짧은 담소마저 나누고 나면 이제는 뭘 하면 될까. 잠깐이지만 몸이라도 좀 풀어볼까, 하는 순간 ‘아뿔싸. 내 버선!’ 하고 세탁실에 널어둔 채 깜빡한 버선을 떠올린다. 분명 아침에 챙겨야지, 하고 생각을 했는데 아이 챙기랴, 연습복 챙기랴 정신없이 서두르다 보니 버선을 깜빡하고야 말았다. 하필이면 발이 훤히 다 보이는 치마에, 색도 치마와 어울리지 않고 유난히 더 돋보이는 무늬 양말을 신고 온 날인데 말이다. 앞자리에 서서 춤을 추는데 흰 버선들 틈에 혼자서만 줄무늬 양말을 신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부끄럽고 거슬린다.


무용을 하는 동안에는 발가락을 위로 치켜들도록 신경을 써야 하는데 버선이 있으면 좀 덜 쑥스럽기도 하고, 또 조금만 올려도 버선코가 오뚝하니 서 있으니 크게 힘을 주지 않아도 되는데, 발모양이 그대로 드러나는 양말을 신은 채 발가락 끝을 올리니 괜히 부끄럽기도 하고 더 힘을 줘야 할 거 같기도 하여 온 신경이 발에 가버린다. 게다가 버선보다 덜 매끄러워 턴을 할 때마다 발목에 힘이 더 들어가 박자도 밀린다.


버선을 빨고 챙겨 오는 일이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어떤 날은 버선을 빨래하는 걸 까먹고, 오늘 같은 날은 널어놓은 버선을 깜빡하고 그냥 와버린다. 윗옷이나 속바지는 입고 나가니까 매번 세탁 후에도 잊는 법이 없는데 버선은 가방 안에서 꺼내 손빨래를 하고 다시 마르는 대로 가방 안에 챙겨 넣어야 하다 보니 까먹는다. 아니, 그래도 까먹지 않는 사람이 훨씬 많으니 이건 오롯이 나의 불찰이다.


지난주에는 이름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성주풀이 입춤을 첫 시간 끝무렵에 잠시 췄다. 기본무를 추는 동안에는 버선 없는 발을 볼 틈이라도 있었지만 성주풀이 입춤을 추는 동안에는 내 발 대신 선생님 발만 쳐다보느라 그럴 여유도 없다. 그래도 믹스커피 한 잔 마시고 선생님께 다가가 혹시 새 버선을 구매할 수 있느냐 물으니 다행히 남는 게 있다고 하신다. 급하게 버선 한 켤레를 구매해서 신고 나니 이제야 마음이 좀 편하다. 원래 신던 버선과는 다른 느낌이지만 춤을 출 때는 이 버선이 훨씬 편하겠다. 스펀지 같은 것이 들어있어 도톰한 원래 버선은 자수도 놓여있어 예쁘긴 하지만 자꾸 신고, 빨다 보니 안의 스펀지가 벗겨져 엉망이 되었다. 앞코도 새로 산 버선이 더 뾰족해서 발끝이 도드라지는 것이 앞으로 춤을 출 때는 이 버선을 신어야겠다.


양말을 신어서 맨발은 아니지만 버선이 없을 때는 마치 맨발로 있는 심정과도 같았기에 버선을 신은 후 훨씬 마음이 편안하고 자세도 당당해진다. 문제의 성주풀이 입춤은 박자를 맞추는 것이 어려워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수업 내내 정승처럼 서 있어야 한다. 평소 무용을 곧잘 따라 하던 언니들도 어려워하는 춤이라 나 같은 박치는 남들만큼 추려면 양말에 신경 쓸 틈도 없이 남들보다 더 집중을 해야 한다.


지난 주만 해도 사복에 양말을 신고 춤을 추는 새 수강생들이 보였는데 이번 주는 다들 치마를 차려입은 후라 옷만 봐서는 누가 신입생이고 누가 기존의 수강생인지 구분이 안 간다. 그래도 일 년을 먼저 배웠으니 수업에 따라가는 속도도 조금은 빨랐으면 좋겠는데 새 버선처럼 실력도 새것만 같을까 수업 내내 진땀이 난다. 엉덩이는 흔들지 말고 어깻짓만 하라는데 정승처럼 보일까 의식이 되었는지 되려 골반을 자꾸 흔들어대서 결국 지적을 받는다. 굽히라는 무릎은 뻣뻣하고 흔들지 말라는 골반은 흔들어대고, 마구 엉망진창이지만 그래도 춤추는 일은 허리가 절로 씰룩거릴 만큼 즐겁다. 지금은 이래도 새 버선 새까맣게 될 때까지 열심히 추다 보면 뭐라도 될 거다. 그리고 비록 버선만 더럽혀지고 춤은 조금도 늘지 않는다 해도 뭐 별 수 있나. 엉덩이를 흔들 만큼 신이 난다는데 그거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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