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과 스승의 날의 수업
1.
연습실에 도착하니 언니 한 명이 캐모마일차를 준비해 준다. 못 보던 통에 캐모마일 티백이 가득 들어있길래 어쩐 일인가 했더니 어버이날이라 어른들께 한 잔씩 드리려고 집에서부터 챙겨 오신 거라 한다. 세상에, 생각이라고 할까, 마음 씀씀이가 다르다. 아무것도 준비 못한 막내는 그저 언니가 부러 준비한 차를 한 잔 얻어먹으며 서서 연습실에서 이뤄지는 대화들을 듣는다. 연령대가 다양하다 보니 어버이날 선물을 챙겨야 하는 입장에서 받는 입장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엿들을 수 있다.
어버이날이라고 하면 주로 무언가를 준비하는 입장의 이야기만 듣다가 이곳에 오니 자식으로부터 무언가를 받은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생긴다. 별 거 아닌 듯 말하지만 목소리 속에서 내심 자랑스러워하는 마음이 느껴지기도 해서 마찬가지로 일터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될 엄마를 떠올린다. ‘어떡하지. 엄마는 자랑할 게 없을 텐데.' 하는 생각에 부끄러움이 몰려온다.
엄마가 일을 하느라 바쁘다는 이유로, 만나기는 커녕 자주 하던 통화도 줄어든 요즘이다. 이번 어버이날은 부모님의 몸상태가 좋지 못해서 같이 식사도 하지 못한 채 계좌로 용돈만 보냈던 터라 더 면목이 없다. 수업에 집중을 해야 하는데 자꾸 엄마 생각에 정신이 딴 데로 새는 바람에 기본무를 추는 내내 여러 번 틀리고 만다. 꼭 자랑스러운 딸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연습실에 와 어버이날 선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어른들을 보니 내가 그동안 철이 없고 무심했구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나이 차이가 나는 친구가 있다고 해도 그래봤자 열 살이다. 어릴 땐 열 살 차이라고 하면 크게 느껴졌는데 무용수업을 듣기 시작하면서 넓은 폭의 연령대만큼 훨씬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는 기분이다. 혈연 혹은 호적 상 맺어진 인연은 나이 차이를 떠나 정해진 관계가 있다 보니 아무래도 나이와 상관없이 호칭에 따라 그 역할을 해내야 한다. 그러나 수업에서는 나이 차이가 아무리 커도 모두가 선생님 앞에서 같은 춤을 배우는 수강생이다 보니 내 안에 만들어져 있던 나이대에 대한 선입견과는 벗어난 모습을 보거나 혹은 그 나이대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부모와 자식의 입장이 아닌 사람 대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는 잘 없다. 머리로는 엄마의 말을 이해하려고 하지만 마음에 따라주지 않을 때가 있는데 이곳에서 만난 다른 수강생들을 보고 나면 엄마의 말을 듣지 않아도 엄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2.
어느 날 갑자기 아이가 물었다.
“엄마한테도 선생님이 있어?”
“그럼. 무용수업에 가면 선생님이 계시지.”
그렇다. 내게도 스승의 날이면 감사 인사를 전할 선생님이 있다. 수업이 있던 어버이날 다음 주인 이번 주 월요일은 스승의 날이었다. 그러고 보니 한국무용을 배우고 벌써 두 번째 스승의 날이다. 이번에도 작년과 마찬가지로 수강생들이 모은 돈으로 떡과 식혜를 사서 다 함께 나눠먹었다. 쉬는 시간이면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휴식을 취할 때가 대부분이지만 스승의 날에는 떡을 필두로 사람들이 모여 앉는다. 마치 스승의 날이 아니라 수강생의 날인 마냥 다 같이 웃고 떠드는데, 듣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어서 나도 모르게 내내 음소거 상태로 따라 웃을 때가 많다.
지난주에는 마음이 심란해서 수업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는데 스승의 날인 이번 수업에는 여느 때보다 열심히 춤을 췄다. 수강생이 선생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별 게 없다. 선생님 말씀을 열심히, 잘 들으며 춤을 추는 수밖에. 저번보다 집중한 덕분인지 이번에는 겨우 입춤의 순서를 조금 익힐 수 있었다. 매번 버벅거리기만 했는데 이번 수업동안 계속 반복해서 췄더니 끝무렵에는 모양새는 부족해도 동작의 순서는 어느 정도 외울 수 있었다.
다른 곳에서 한국무용 수업을 들어본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수업 내내 기본무를 반복해서 추는 것이 대부분이라는데 이 수업에서는 기본무는 물론, 매 학기마다 새로운 작품을 가르쳐주고 선생님이 직접 앞에 나와 동작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집어서 알려주기도 한다. 안 되는 동작은 몇 번이고 반복하고 제대로 따라 하지 못하면 지적도 하는데 다들 어른이라 그런지 선생님이 혼을 내면 쑥스러워하면서도 깔깔 거리며 웃는다. 배우고 지적당하는 일이 마냥 즐겁기만 하진 않겠지만 모두들 선생님의 열정에 감사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열심히 따른다. 배우는 학생도 물론 힘들겠지만 몸이 굳은 학생들을 상대로 작품을 가르치는 일은 누구보다 선생님에게 가장 힘든 일일테다. 멋모르고 시작한 한국무용이지만 이렇게 최선을 다해 수업을 가르치는 선생님을 만나게 된 건 정말이지 감사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