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돌을 씹었을 때 안 미안한 5번 유형의 사람들의 설명은 거의 다 똑같다.
1. 내가 한 일이 아니다.
2. 내가 식당을 고르거나 밥을 지은 것이라 하더라도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다.
3. 그러므로 책임이 없다.
즉, 의도성이 없었고, 그 행동을 하지 않았으므로 내 책임이 아니고, 책임이 아니니 미안하지 않다는 설명이다.
나는 오늘 아침에 실수로 반려묘인 다홍이의 꼬리를 밟았다. 밟는 동시에 화들짝 놀라 발을 들었지만, 이미 꼬리를 밟힌 고양이는 꺆!!! 하고 소리를 쳤고, 꼬리가 괜찮은지 확인할 새도 없이 잽싸게 도망을 갔다. 그 순간 여러 마음이 빠르게 스쳤다. 먼저 “움찔” 반응이 있었고, 그다음에는 내 큰 몸으로 저 가녀린 꼬리를 밟았으니 얼마나 아플까 싶어 미안하고 속상했고,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입 밖으로 저절로, 진짜 저절로 나왔다.
“아니 너는 왜 내 발 앞에 꼬리를 두니? 아직 잠도 안 깬 걸 보면 몰라?”
당연히 모르지. 가만히 앉아있던 고양이가 무슨 잘못이라고 탓하는 마음이 생길까? 그리고 만약 다홍이가 사람이었다면, 나한테 뭐라고 할까? 아마 “네가 밟아놓고 왜 나한테 그래?”라고 따지지 않을까?
다음은 수치심과 연약함 등의 연구로 유명한 연구자인 브레네 브라운이 들려준 일화이다.
어느 날 아침, 흰색과 분홍색의 파자마를 입고, 부엌에서 커피를 만들어 커피 잔에 가득 부어 마시려고 합니다. 그런데, 커피잔을 타일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잔은 수만 개의 조각들로 부서지고 나는 커피를 온몸에 뒤집어썼습니다. 바로 그 순간, 그러니까, 커피잔이 바닥에 떨어지고 0.0001초 후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내 입에서 튀어나왔습니다. “빌억먹을 스티브”
스티브는 제 남편입니다. 스티브는 친구들과 취미로 워터 폴로를 치는데, 그 전날 밤에 친구들과 게임을 하러 나갔다 왔습니다. 집을 나서는 그한테, “10시 전에는 꼭 와야 해~ 자기가 없으면 잠이 잘 안 와”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10시 30분에 집에 왔고, 그래서 평소보다 늦게 잠에 들었지요.
그래서 이 날 아침 두 번째 커피를 만들어 마시던 참이었고, 그가 전날 제때 집에만 들어왔다면 이 커피를 만들어 마시지도, 쏟지도 않았을 것이니까요.
바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그 순간 남편 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스티브: “자기야 지금 뭐해?”
브레네: “뭐하냐고?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말해주지. 나는 지금 쏟은 커피를 치우고 있어...”
“두~~.” 그가 전화를 끊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깔깔 웃었는데, 아, 이게 바로 나구나! 싶어서 뜨끔했다. 안 좋은 일이 생길 때, 아주 순식간에 뇌가 온 주변을 스캔한다. 그리고 어디선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다. “누구 탓이야?” “누가 그랬어?”
누군가 잘못을 해서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었을 때, 우리는 다음 세 가지 질문을 한다.
1. 누가 그랬어?
가장 먼저 묻는 질문이다. 쌍방으로 문제가 있었다면, 먼저 시작한 사람이 누군지를 묻고는 한다. 싸움이 있을 때 제삼자들이 제일 먼저 묻는 것도 이것이다. “누가 때렸어?”
2. 일부러 그랬데?
꼬맹이들끼리 티격태격하다가 밀쳤던, 부부가 싸우면서 험한 말을 했던, 누가 다른 사람을 폭행했던, 그 행위가 의도적이었는지 의도적이지 않았는지를 따진다. 의도성의 유무에 따라 야단이나 비난이나 형벌의 크기가 달라진다.
3. 왜 그랬데?
의도성이 있다면, 즉 일부러 그 일을 저지른 상황이라면, 그다음에 꼭 묻는 것이 “왜?”이다. 왜 그랬는지 이유를 묻고 그 이유가 타당한지를 판단한다. 누군가를 일부러 칼로 찔렀다고 하더라고 그것의 이유가 정당방위였다면, 법의 판단은 매우 달라진다.
비난에 대한 연구를 하는 Bertram F. Mall는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가장 괴로워하는 것이 왜 그 피해를 자기가 당했는지를 모르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복수극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피해자가 가해자를 찾아가서 응징을 하기 전에 꼭 물어보는 것이 이것이다. “왜 그랬어? 도대체 나한테 왜 그랬어?” 그리고 이유를 밝히기 위해서 시간을 끌다가 다 잡은 사람을 놓치는 장면이 흔히 나온다.
그런데,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많은 피해의 경우, 누가 그 피해를 일으켰는지 애매하거나, 의도성이나 이유가 불명확한 경우들이 많다. 잘못한 사람을 찾아서 묻는다고 해도, 정확한 이유를 듣지 못하기도 한다. 모른다는 것이 참 괴로운 일인데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미결과제에 대한 집착이 커지고, 복수를 하던 재판을 하던 잘잘못을 따지던, 누가 잘못했는지를 명명백백히 밝히고나 하는 불같은 욕구에 사로잡히고는 한다. “당신의 미결과제가 되고 싶어요.” 헤어질 결심에서 탕웨이의 대사가 떠오른다. 정말 사람을 괴롭힐 줄 아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다시 밥 먹다 돌 씹는 예로 돌아가 보자.
1. 누가 그랬데?
돌에 대한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 수 있을까? 식당 사장님? 밥을 한 요리사? 쌀을 씻은 보조? 쌀집 사장님? 벼 농사꾼? 애매하다.
2. 일부러 그랬데?
의도성이 아마도 없을 것이다. 의도성이 없으니 이유 또한 없다. 그런데,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닌 경우에 책임의 소지가 정말 없을까 아니면 있기도 할까?
앞서 자신이 1번 유형이며, 왜 미안한지를 설명해주신 강 선생님의 경우, 자기가 일부러 돌을 넣은 것이 아니고, 직접 밥을 지은 것도 아니니 돌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은 없지만, 그 일을 막지 못한 책임은 느낀다고 말했다. 만약 자신이 그 돌을 씹었다면, 친구가 불편을 겪지 않았을 수도 있는 것이, 자기가 돌을 대신 안 씹은 게 미안하다고 했다. 즉, 그분의 미안함은 뭐를 해서가 아니라 뭐를 하지 않아서에 대한 미안함이다.
사람들이 행동을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연구하는 인지언어학자인 Bertram F. Mall에 의하면, 의도적으로 행해진 과오에 대하여서는 책임을 물을 대상, 의도, 이유, 이 세 가지를 따지지만, 의도성이 없는 과오나 잘못에 대하여서는 복잡한 생각의 과정을 거치며, 이 생각은 과거적 관점과 미래적 관점으로 나뉜다고 한다. 과거적 관점은 ‘그 일을 예방할 수는 없었나?’하는 질문을, 미래적 관점은 ‘앞으로도 이 일이 반복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하는 질문을 하게 한다. 그리고 예방에 대한 질문은 다시 두 가지로 나뉜다. 1. 예방을 했는가 안 했는가 2. 예방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즉, 예방 책임과 예방 능력을 따지는 것이다.
이것은 부모가 아이를 야단칠 때 자주 하는 말이다. 아이들이 넘어지거나 뭔가를 깨거나 할 때, 일부로가 아니라 실수인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예를 들어, 동생의 손을 놓쳐서 동생이 넘어지고 무릎이 까졌는데, 엄마가 형아를 이렇게 야단친다.
“너 왜 그랬어? 너가 조심을 했었어야지. 왜 동생 손을 놓아서 넘어지게 했어. 앞으로 또 그럴 거야 안 그럴 거야?”
엄마는 큰아이가 일부러 동생을 넘어뜨리게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의도성이 없다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과거적 관점으로 보자면, 동생 손을 놓지 않았다면, 동생이 넘어지는 것을 막았을 수도 있지 않았는지를 묻는 것이고, 또 미래적 관점으로는 이 일이 앞으로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교훈적 훈육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동생은 그 일을 예방할 능력이 없으므로, 동생을 야단치는 것이 아니라 예방을 할 능력이 있다고 보는 형을 야단치는 것이다.
그런데, 당신이 만약 동생 때문에 야단을 맞아본 적이 그 형이라면, 이런 야단을 맞았을 때 어떤 생각을 했는가? ‘아 내가 그 상황을 예방했었어야 했는데, 예방을 못한 것은 나의 잘못이구나. 앞으로 조심을 해서 동생이 다치지 않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경우는 별로 없을 것이다. 대신 “왜 나한테 그래!! 내가 동생을 민 것도 아닌데!” 그러면서 억울해하거나, 동생을 미워하거나, 둘 다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 반복적으로 이런 일로 억울한 아이가 어른으로 자랐다면 어떻게 될까?
“내가 뭘 잘못했다고! 넘어진 건 너자냐?, 왜 나보고 그래? 내가 일부러 그랬어? 왜 내가 너의 기분이 섭섭함에, 너의 슬픔에 책임을 져야 해? 난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정리를 하자면, 의도성이 없는 일에 대하여 비난을 할 때는 의도성이 있는 과오와 다르게, (1) 예방책임(그 일이 일어나지 않게 예방을 했는가)과 (2) 예방능력(예방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는가)을 따지며,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각자의 해석과 사회적 관점과 개인의 역사에 따라 내가 돌을 넣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미안해 할 수도 있고 전혀 미안해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렇게 무엇을 미안해하는가에 대한 기준이 다양한 것처럼, 책임에 대한 기준도 다양하다. 어디부터가 온전히 내 책임이고, 어디부터가 온전히 상대방의 책임이고,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우리가 함께 만들고 참여한 책임의 영역일까? 극단적인 경우는,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내 책임이라고 생각할 수 있고, 반대로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다른 사람들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모
든 것이 내 책임 만 일 수도, 모든 것이 상대방의 책임만을 수는 없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고, 우연도 있고, 우리가 함께 참여하고 만든 불행도 있다. 그리고 내 책임과 네 책임 사이에 강이 흐른다.
문화에 따라 이 강을 좁게 생각하기도 하고 넓게 생각하기도 하다. 각자의 책임을 강조하는 미국과 캐나다 같은 나라에서는 경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인도와 같은 나라는 개인들과의 경계가 모호하며, 따라서 사과도 잘하지 않는다. 나와 너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면, 언제 이 경계를 넘었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한국은 더 이상 한 민족 하나의 문화로 다 설명이 되지도 않는다. 이 강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건널지가 관건이다.
참고 문헌
Archana, “Why Indians Don’t Say Sorry,” Archana and More (블로그)
https://archkale.wordpress.com/2018/04/01/why-indians-dont-say-sorry/
Bertram F. How the Mind Explains Behavior: Folk Explanations, Meaning, and Social Interaction, MIT Press,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