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은혜 Oct 15. 2022

내가 밥 먹다 돌을 씹으면 너는 미안하니?

미안함에 대한 탐구를 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미안함에 대하여 사람마다 다른 기준이 있다는 것이 놀라운 점이 아니라, 다른 기준이 있음을 깨달을 때 사람들이 많이 놀란다는 것이 나의 발견이다.

누군가 당신의 삶의 가치가 뭐냐고 묻는다면, 아마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물고기에게 바다가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그리고 물고기가 말을 할 수 있다면) “바다가 뭐야?”라고 반문할 것이다. 물고기가 바다를 깨닫는 순간은 수면을 뚫고 점프하는 순간, 공기와 하늘을 만나는 바로 그 순간일 것이다.


사람으로 따지면 나와 다른 삶의 가치를 가진 사람과 부딪치고 나의 신념 체계가 흔들릴 때, 그제야 나의 가치가 보인다.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나의 가치는 나의 것이 아니라 너무나 당연한 온 우주의 섭리처럼 느껴진다. 그러다가 이 우주의 섭리를 따라지 않는 사람을 만날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하고는 한다. “제 미친 거 아냐?”

미안함에 대한 이야기를 친구들과 밥을 먹으면서 하고 있었다. 마침 밥을 꼭꼭 씹어 먹고 있던 참이라, 이런 예시가 즉석에서 떠올랐다. 

나: 친구랑 밥을 먹고 있는데, 돌을 씹었어. 그럼 너는 미안할 거 같니? 네가 그 식당을 선택했다면, 네가 그 밥을 한 거라면, 어떨 것 같아? 

연우: 난 미안할 거야. 왜냐고? 음. 일단은 그냥 미안할 거 같은데. 이유를 굳이 생각해보자면...돌을 씹은 게 내가 아니고 친구여서? 만약 그 식당을 내가 고른 거라면? 그럼 더 미안하지. 만약 내가 그 밥을 했다면? 아, 그건 정말 너무너무 견디기 힘들 거야!

경진: 나는 미안하지 않을 것 같다. 우연하게 일어난 일이고, 내가 일부러 돌을 넣지 않은 이상 안 미안할 것 같아. 근데, 그러고 보니 일부러 돌을 넣었다면 그것도 미안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이 대화를 시작으로 사람들하고 밥을 먹을 때마다 같은 질문을 물었고, 이렇게 <밥 먹다 돌 씹는 친구 테스트>가 개발되었다. 당신도 한번 해보시라. 혼자 하지 마시고, 친구와, 동료와, 애인과 해보시라. 이성적인 답을 찾는 것이 아니므로, 곰곰이 생각해 보지 말고, 즉각적으로 답을 내려 보자. 그리고 서로의 선택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자. 아마 재밌는 대화가 될 것이다. 



<밥 먹다 돌 씹은 친구 테스트>

친구랑 밥을 먹다가 친구가 돌을 씹었다. 당신은 어떨 것 같은가?

1. 무조건 미안하다.
2. 미안하다. 내가 대신 씹거나, 다른 식당을 고르거나, 이 상황을 막지 못해서 미안하다.
3. 미안하다. 단, 내가 선택한 식당이라면.
4. 미안하다. 단, 내가 밥을 한 거라면.
5. 안 미안하다. 내가 일부러 돌을 넣은 것이 아니다.
6. 안 미안하다. 돌을 잘 뱉지 않고 씹은 것은 그 사람 잘못이다.
7. 안 미안하다. 돌을 씹으라고 일부러 돌을 넣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1번~5번 중의 하나를 고른다. 만약 상대방이 7번이라면, 멀리 도망가기를 바란다. 6번이라면, 아마 싸울 일이 많을 것이니 마음을 단단히 먹으시라. 흥미로운 것은 무조건 미안한 1번 사람은 왜 미안한지에 대한 이유를 말할 때 애매모호하게 “그냥” “무조건” 이런 수식어를 쓰고 왜 그러는지 잘 모르는 듯했다. 즉 감정적인 리액션이지 이성적인 판단이 아닌 것이다.


반면 안 미안한 5번 사람은 자신이 왜 안 미안한지에 대하여 자세하게 논리적인 설명을 했다. 다른 유형의 사람들이 섞여있을 때는 ‘나와 같이 사는 저 사람이, 나와 같이 일 하는 저 사람이, 나와 다르구나!’는 깨달음의 순간이 있고는 했다. 그런데, 비슷한 사람들만 모인 집단에서는,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해도, “에이, 설마~ 그런 사람이 있다고?”라며 잘 믿지 않았다.

자신이 1번이라고 한 강 선생님과 5번이라고 한 윤 선생님과의 대화에서 더 자세한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두 분은 모두 은퇴하신 교사시다.

강 선생님:
나는 너무나 미안할 거야. 만약 내가 그 밥을 했다면? 아 그러면 내가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아요. 내가 일부러 돌을 넣은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내가 그 식당을 선택했을 수도 있고, 다른 메뉴가 아닌 밥을 내가 먹자고 했을 수도 있고, 또 그런 선택을 한 게 아니더라도 미안할 거예요. 같은 밥솥에서 푼 밥일 건데, 그 돌이 내 밥에 들어올 수도 있고 친구 밥에 들어갈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러면 차라리 내가 돌을 씹었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러면 친구가 돌을 안 씹었을 텐데요.

자기가 5번이라고 한 윤 선생님은 친구가 돌을 씹은 것에 대하여 불편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단지 “미안함”이라는 단어로 표현하지는 않을 것 같다고 했다. 미안한 것은 잘못한 것이 있을 때 가지는 감정이고, 자기가 잘못한 것이 없기 때문에 미안하지는 않지만, 안타까운 마음은 있을 거라고 했다.

그렇다면 ‘미안함’이라는 단어에 대한 해석이 달라서일까? 아니면 이 단어 자체가 적절치 않은 걸까? 이 점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1번인 나에게는 이것이 ‘미안함’이라는 감정이 맞다. 내가 뭔가를 해서 생기는 미안함이 아니라 뭔가를 안 해서 생기는 미안함. 나는 괜찮은데 친구가 불편함을 겪고 있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 마치 친구가 돌을 씹음으로써 내가 안 씹게 된다는 것 같은 죄책감에서 나오는 미안함, 왠지 모르지만, 내가 뭔가를 잘못했었을 것 같은 미안함이 있다.

한 번은 친한 동생인 민수의 직장에 놀러 갔다가 민수와 민수의 직장동료인 준수와 같이 점심을 먹게 되었다. 그때도 밥을 먹으면서 <밥 먹다 돌 씹은 친구 테스트>를 했다. 민수는 일할 때, 그리고 평소에도, 미안하다는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이다. 민수와 준수는 데스크에서 고객을 상대하는 일을 하는데, 요즘 고객들의 항의가 많고, 그럴 때 민수는 미안하다고 하는데, 준수는 한 번도 미안해하거나 그 비슷한 말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고객 항의의 원인을 만든 지점장도 미안해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 보니 왜 모든 미안함은 자기의 몫이 되는지, 그리고 왜 아무도 자기한테 미안해하지 않는지 민수의 억울함이 쌓여가고 있던 참이다.

<밥 먹다 돌 씹은 친구 테스트>에서 민수는 1번이라고 했고, 준수는 5번이라고 했다. 그리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각자의 생각을 나눴고, 큰 토론 없이 식사를 마쳤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일이 있었다. 그날 밤, 민수는 준수로부터 문자 하나를 받았다.

“혼자 고생하게 해서 미안해요.”

민수는 기적이라고 했다. 민수로부터, 그리고 직장동료들을 통틀어 미안하다는 말을 처음 들은 것이다. 이것은 <밥 먹다 돌 씹은 친구 테스트> 덕이라고 했다. 그 짧은 대화가 무엇을 한 걸까? 실제 상황이 아닌 가상의 상황이어서, 편안한 마음으로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미안함에 대한 다른 기준을 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나의 미안함과 너의 미안함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만으로도, 상대방의 언어로도 말해주게 된 것이 아닐까?

실제로 이 짧은 대화에서 무릎을 치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 그래서 내 남편이 그랬구나!”라며 20년 넘게 같이 산 남편이 이제야 이해가 된다는 친구가 있었다. 오래된 수수께끼가 풀렸다는 사람을 여럿 만났다.


그리고 나도 인도 여행을 다닐 때 왜 아무도 사과를 안 하는지에 대한 수수께끼가 풀렸다. 인도 사람들은 내가 만난 가장 여유롭고 친절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기차가 늦던, 버스 기사가 사람들을 두고 점심을 먹으러 가던, 내 짐이 사라졌던, 아무도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신의 뜻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신이 하나의 신이 아니어서 어느 신의 뜻인지도 알 수 없었다. 내가 돌을 씹은 게 내 탓도 너 탓도 요리사 탓도 아니고 신의 뜻이라면 그건 사과의 영역이 아니겠구나!


이전 01화 나는 미안한데 너는 왜 안 미안하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