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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씨는 잘하는 게 뭔가?

이게 빗자루라는 거야. 본 적 있지?

 은행원이 되면 폼나게 일을 할 줄 알았다. 멋들어진 정장에 세련되고 깔끔한 창구에 앉아있으면 괜히 엄청난 집단에 소속된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부장님 MMF계좌에 30억 입금하겠습니다." 종종 들리는 선배의 저런 멘트 한마디면 어깨뽕이 이마까지 올라온다. 얼른 내 자리가 생겼으면 좋겠다. 아직은 창구에서 한 발치 떨어져 사수가 처리하는 업무를 볼펜으로 바쁘게 끄적거리기나 하고 있다. 내 손은 사수의 일 처리 속도를 도통 따라가지 못했다. 써낸 글들을 보니 무슨 글씨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따 다시 깔끔하게 정리해야지...' 사수가 할 일이 있으니 잠깐 앉아서 업무방법서를 보고 있으라 하셨다. 점심도 먹었겠다, 손님도 없겠다, 졸음이 몰려오던 찰나 이사님이 나를 부르셨다. "은행씨 일로 와봐!" 할 일을 주는가 싶어 밥시간에 맞춰 뛰어가는 개처럼 달려갔다. 이사님에게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은행씨, 군대에서 화장실 청소 해봤지? 여기 소변기 좀 씻어봐. 구석구석 빡빡 닦아봐 좀", "은행씨, 여기 화분에 물 좀 줘~ 얘네들 예민해서 관리 잘해야 된다. 앞으로 은행씨가 목요일마다 물 줘!"


  출근 2주 차, 그렇게 나의 업무는 청소가 되었다. 오후 6시 반, 윗사람들이 갈 때까지 뻐대기고 있다가 겨우 남은 분들의 눈치를 보며 퇴근했다. '여기 진짜 군대보다 더 하네..' 지친 마음에 저절로 푸념이 나왔다.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버스 시간은 15분이나 남아있었다. 그때 휴대폰으로 문자가 왔다.



  '이사님, 제가 청소나 하려고 온 줄 아십니까? 저 그냥 다른 곳 알아보겠습니다.', '이사님, 여기도 너무 좋지만 다른 곳으로 가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

아 어떻게 말해야 좋게 나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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