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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오시던 치매 할아버지

 입사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이제 사수의 창구에서 내가 직접 일을 해보고 있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나 보네. 천천히 해요. 누구나 그럴 때가 있지. 나 시간 많아~" 아직 어리숙한 내 모습을 보고 나이 지긋한 할머니께서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주셨다. 무사히 업무를 처리하고 감사한 마음에 진심을 담아 인사를 했다. 훈훈한 마음이 가시기도 전에 먼발치 대출 창구에서 큰 소리가 났다. "내 돈 내놓으라고!"


 할아버지가 오늘도 오셨다. 여든이 넘어 보이는 할아버지는 내가 첫 출근을 한 날로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오전 10시가 되면 출근 도장을 찍으셨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와 항상 여자 대리님 창구로만 가셨다. 할아버지는 처음 오신 날 통장에서 30만 원을 출금하셨는데 치매가 있으셔서 출금한 걸 기억하지 못했다. 할아버지께 돈을 찾아가셨다고 설명을 드리면 씁쓸한 표정과 알겠다는 말만 하곤 금방 돌아가셨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갈수록 말과 행동이 거칠어지시더니, 이제는 여자 대리님의 창구에서 업무를 봤다는 것 말고는 기억나는 게 없으셨고 30만 원이 출금된 통장을 보고선 직원이 돈을 훔쳐갔다고 생각하셨다. 날이 갈수록 정도가 심해지긴 했어도 할아버지는 남자 주임님이 한참을 진정시킨 후에는 별말씀 없이 돌아가시곤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할아버지가 안 보이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안 오신다는 걸 다른 직원이 말하고 나서야 알아차렸다. 날이 갈수록 상태가 나빠졌던 걸 두 눈으로 봐왔기에 내심 걱정이 되었다. 이후 지점으로 발령받고 길에서 할아버지를 마주쳤다. 한 달간 뵀던 분이라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차마 인사는 드리지 못했다. 그래도 훤칠한 키에 허리도 꼿꼿이 서 계셨고 여전히 빵모자를 단정하게 쓰고 계셨다. 은행에 방문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보면 괜히 가족들이 보고 싶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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