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의 명암에 뚫린 삶

시들해지는 데는 이유가 있다

by 은후

숨탄것들이 시들해진다면 무언가 원인이 있습니다. 먹을 거 먹는데도 자꾸 어두워지고 늘어진다면

마음을 살펴보라는 신호탄인가 봅니다.


햇살이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이란 걸 자랑하듯 나날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 마치 내일은 없다는 듯 오늘을 불태우는 듯하다. 숨이 턱 막히는 불볕더위는 가로등마저 나무에 기대 오수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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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팔트와 콘크리트에 둘러싸인 텃밭은 괜찮을까. 낮동안 뜨겁다가도 밤이면 서늘했던 지난주는 꿈이었던가. 오후까지 절절하게 데운 열기는 새벽이 다가와도 식을 줄 모른다. 붉은 끈으로 해먹이라도 만들어 고추와 가지에게 죽부인처럼 몸을 기댈 수 있게 해 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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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지와 척척 맞는 호흡으로 무난히 텃밭에 걸칠 수 있는 지지대를 완성했다. 날은 무덥지만 감성만이라도 핑크 하게 최면을 걸어보라는 의미로 핑크색 끈으로 초록에 튀는 색을 입혔다. 뭔가 음양의 조화를 임의로 꾸며주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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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고추, 오이를 사이좋게 세 모종을 심었었다. 서로 공간으로 인한 불편함을 주지 않고 자유롭게 자라라는 엄마의 마음으로 방 하나씩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다들 초보 식집사라는 꼬리표를 달지 않게 해 줘 대견한 텃밭이었다. 다만, 맨 오른쪽 오이만은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오이 둘이 뿌리 근처가 시들해서 자꾸 맘이 쓰이던 차였다. 가운데 오는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다시 초록해졌다. 그러나 오른쪽 가장자리 오이는 아픈 손가락이 되었다. 이상하다 싶었다. 왜 오이 둘이 시들해졌을까. 아픔에도 영혼을 끌어모아 꽃을 피워냈고 오이를 품었다. 오이 모양이 둥글게 말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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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처럼 오이도 태아는 웅크려있는가 보다 했다. K 선생님이 물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해서 물을 매일 저녁때면 조금씩 주었다. 나의 노력에도 아랑곳없이 오이는 비실거렸다. 그러다 고꾸라졌다. 수분은 소용없었다. 나의 관심과 사랑은 오이에게 가 닿지 않았다. 왜일까? 무엇이 잘못된 걸까. 내가 놓친 게 무엇일까.


멀칭에 움푹 파인 홈이 빈자리가 자꾸만 눈에 와서 박힌다. 셋이었다가 둘이 된 오이가 시름한 것도 빈자리에 전염된 것이었을까. 그러다가 문득 벽면을 만지게 되었다. 어라, 이건 무슨 소리일까. 이 진동은 뭘까? 부르르 사시나무 떨듯 흐느끼는 것 같은 이것은 도대체 정체가 무엇일까.

관리소에 방문해서 소리의 원인을 물었다. 소장이 말하길 자가 발전기 소리라고 한다. 그 소리는 밤낮을 가리지 않았을 터.
나의 오이는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을까. 원인 없는 결과가 있었던가. 오이의 그늘엔 사람도 힘든 소음과 진동이란 거대한 스트레스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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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분도 아닌 스트레스가 오이의 생명을 모로 말았고 결국 모태의 탯줄 같은 물관을 스스로 닫게 만든 것이었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다. 스트레스에 오래 노출되면 사람도 면역세포에 취약해진다. 사람의 언어인 말로 나와 소통할 수 없는 오이는 얼마나 답답하고 힘겨웠을까.

작년 나는 BMI지수로 저체중 5 퍼센트 구간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오랜만에 날 본 친구들이 입을 맞춘 듯, 살 그만 빼라고 하였다. 이제껏 나는 다이어트란 걸 해본 적이 없다. 찌면 찐 대로 빠지면 빠진 대로 살았다. 내가 저체중을 실감한 건 사진을 보고 나서였다.

세상에나, 살이 빠지면 목의 살도 빠진다는 걸 처음 알았다. 옆으로 돌린 고개로 쭈글거리는 목주름이라니. 어느 날 갑자기 이렇게 급노화가 진행될 수 있다는 게 큰 충격이었다.

현재는 다행히 복구되었다. 너무 연약해 보인다면서 그러다 아프면 훅 간다는 P 남자 선생의 말씀에 체중계에 올라갔다. 41.5 킬로미터? 띠로리, 이게 실화인가. 참고로 P 선생은 꽤 과묵한 중년이시다. 저 몸무게는 초등 때 체중일 것이다.

그날 이후로 뭐든 닥치는 대로 먹었다. 소가 되새김하듯 먹을 게 보이면 꾸역꾸역 해치웠다. 기존 체중으로 돌아오는 기간은 단 두 달이면 충분했다. 빼는 건 어려워도 찌우는 건 단시간이란 말이 실감 났다. 퀭한 눈자위(눈자욱)도 밝아지고 목주름도 백 퍼센트는 아니지만 그때처럼 주글거리진 않는다. 그 충격으로 목주름 크림을 하나 구매했다. 빠진 스키니 한 몸매보다 목살이 나는 더 소중하다.

왜 그렇게 몸무게가 줄었을까. 그 당시 가족 두 명이 연달아 마치 바통 터치하듯 아팠다. 한 사람이 회복되고 있어 긴장을 놓은 순간에 다른 가족이 또 아팠다. 소중한 이들이 앓고 있어 게으른 나는 답지 않게 동분서주했다. 그래서일까. 배고픈 줄을 몰랐다. 밤잠을 줄여 잠보가 병에 대해 공부했다. 적을 알아야 이길 것 같았다.

자려고 누우면 뱃속에서 자꾸 소리가 났다. 그래서 알았다. 저녁을 걸렸음을. 감성은 무시했지만 몸은 알고 있던 거였다. 그래서 내게 보이는 빨간 신호등을 켜준 거였다. 스트레스받지 말라고. 숨탄것들은 모두 스트레스에 오랫동안 노출되면 생명 연장에 지장을 초래한다는 걸 오이의 빈자리로 다시 톺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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