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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소설책을 받아 든 설렘

초여름의 기억을 펼쳐보다

by 은후

뭉근하게 관조하고 소회 한 휴머니티

- 정이흔 소설가의 『초여름의 기억』을 읽고 -




스스로의 체험을 바탕으로 매우 솔직하게 과감한 표현도 개의치 않은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프랑스의 아니 에르노와 체험하지 않은 것도, 체험한 그대로 쓴 것도 단 한 줄도 없다는 독일의 대문호 괴테를 언급하며 시작해 본다.


경험 없이 심금을 울리는 글을 쓸 수 있을까. 있을 수도 있겠지만 천재가 아닌 보통사람들은 아는 만큼 보이고 경험한 만큼 깊은 글을 우려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이흔 작가의 갓 나온 소설모음집인 『초여름의 기억』을 읽었다.


술술 읽히는 이 책은 브런치스토리를 통하여 이미 읽은 바 있지만, 책을 통해 활자로 읽는 아날로그는 새록새록하게 다가와 속삭인다.


관계란 사람과 사람의 사이, 모 작가는 그를 일러 사랑의 거리, 배려의 거리라 칭하기도 했다. 정이흔 작가는 초여름의 기억을 통하여 가족과 친구 또는 이웃을 통한 주변을 돌아보게 한다. 그 경계를 넘나드는 울타리에서 우리는 수많은 희로애락을 경험하고 더불어 삼독으로 고뇌하기도 한다. 반면에 그 울타리 안에서 우리는 사람으로 치유받고 인정받으며 한층 성장을 이룬다.



의식과 무의식의 병치


잠이 들면 우리는 꿈을 꾼다. 꿈에서는 어떤 것도 가능하다. 동물이 될 수도 있고, 날아다닐 수도 있으며, 선악을 넘나 든다. 한창 클라이맥스에 달아오를 때 그때가 흥미진진하지만 함정일 수 있다. 그때는 의식으로 돌아와야 한다. 만약 동물로 변했다가 맞아 죽을 위기에 처했을 경우에 무의식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다면 의식과 합체할 수 없을 것이다. 결정적 순간으로 절체절명의 순간이 될 수 있다. 자칫하다간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요단강을 그대로 건너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말은 목구멍 깊은 곳에서만 빙빙 돌았다. 고구마를 몇 개 먹은 것 같은 갑갑함이 밀려 올라왔다. 그렇게 끙끙거리고 있던 그는 갑자기 누군가 등을 세차게 때린 것처럼 목구멍에 걸린 답답함이 내려가면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순간 등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야 한다.

『도서관의 봄』부분 인용


'믿고 싶지 않았던 말이 의사의 입에서 나오자, 나는 밝은 대낮임에도 진료실 창밖에 예의 그 그림자가 어른 거리는 모습이 보이는 것을 느끼'는 순간에서 벗어나야 하다.

『그림자』부분 인용



기억을 통한 관계의 재발견


젊음은 싱싱하고 뜨겁지만 미숙하고 작은 것으로 쉽게 불씨가 꺼질 수 있다. '초여름의 기억'의 등장인물은 외향성보다 내향성이 짙다. 응시하고 관심이 가지만 섣불리 고백하거나 마음을 앞서 가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끝내 좋아하는 감정을 표현하거나 고백을 감행하지 않는다. 고백하지 않는다 하여 그 마음이 결코 작지는 않을 것이다. 정이흔 작가는 기억을 통해 새로운 관계를 도출한다.


'너 왜 그때는 나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던 거니? 시간이 흘렀지만, 항상 궁금한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그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며 빙긋이 웃는' 청춘이다.

『청춘』 부분 인용


'그러던 차에 뜻밖의 장소에서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교내 시위가 일상이던 시절의 오래된 사진 자료 중 공학관에서 추락사한 여학생을 추모하는 현수막 안에서 그녀가 환하게 웃는' 그해 초여름은 그의 기억 속에서만 나타난다.

『초여름의 기억』부분 인용



체험과 상상을 버무려 일상에서 만나는 관계를 재정립하는 시도를 한 듯 보이는 정이흔 작가의 『초여름의 기억』은 읽기 시작하면 그야말로 눈이 따라가고 손은 거드는 한 권이지만 한편 같은 소설모음집이다.


설레는 첫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나의 서투른 이 글로 작품에 누가 되지 않길 바라면서 『초여름의 기억』이 독자에게 각인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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