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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후 May 13. 2024

파도를 거슬러 오르는 연어

이름의 알을 낳다


잘못 건드린 리모컨이 꿈틀거린다. 대궐 같은 한옥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화면에 빨려 들어갈 듯 몸이 예각으로 접힌다. 어딜까 호기심을 촉발한 풍경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개량 한복의 남자가 텃밭의 푸성귀를 뜯었다. 오이, 호박잎과 깻잎, 상추 등을 씻어 뚝딱 요리를 완성한다. 한 상 가득 푸짐한 음식은 오직 딸을 위한 솜씨였다. 요리 장인 아빠의 공주님은 누구일까. 한다감, 혀를 물다가 입술을 닫는 완성이 느껴진다. 한이라 하면 청주가 유명하다. 알고 보니 구미호로 분해 무더운 여름밤을 식혀 주었던 배우였다. 데뷔 후 한참 알려진 뒤 갑자기 개명했다. 어떤 사정이 있었으리라. 한때 나도 개명을 꿈꾸지 않았던가.


여흥이 본관인 나는 과장하면 로열패밀리이다. 물론 우리나라는 왕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조선 왕조 오백 년 역사에서 가장 많은 왕비를 배출한 가문 중 하나이다. 단본인 조상은 경기도 여주에 뿌리를 내렸다. 흔치 않은 성씨로 문중 어르신은 일가를 만나면 반가워한다. 인사 끝엔 언제나 아버지 함자를 궁금해한다. 이제껏 나보다 항렬이 높은 문중을 만난 적이 없었다. 늘 할머니뻘이나 아주머니뻘이다. 이름의 가운데 ‘병’이 세손인 나의 돌림자이다. 아버지께 참 감사한 것 중 하나가 전통을 깨뜨린 소신이다. 돌림자로 딸의 출생신고를 마다하셨다. MZ세대라면 혹 구태의연하다고 할 항렬자는 아직도 지켜지는 전통이다. 만약 아버지가 뜻을 굽혔더라면 어릴 때 놀림 좀 받았을 것이다.


중학교 때이다. 한문 선생님이 출석을 부르셨다. 안경 너머로 꿰뚫는 빛은 오금이 저렸다. 어설픈 거짓을 고하다가는 된통 당하리라. 초월한 듯한 은색 눈이 찌를 듯 예리하다. 그런 분이 말씀하셨다. 한자에 획수가 많아 속상한 이름이다. 끝 자를 획수가 적은 한자로 바꾸면 좋겠다 얹어주신다. 교무실에 심부름 갈 때면 선생님은 아쉽다 되뇌셨다. 선생님이 종이에 적어주신 이름은 ’‘맑을 숙淑’이 아닌 ‘임금 후后’였다.


한동안 격동의 세월을 보냈다. 뭔가 시도하면 제대로 꼬인 칡넝쿨만 같았다. 문득, 선생님 말씀이 떠올랐다. 이름을 바꿔 뒤엉킨 실을 풀어 보자. 마침 법이 개정돼 개명이 수월해졌다. 물어물어 이름을 잘 짓는다는 철학관을 찾아갔다. 좌정한 작명가는 바꾸려는 연유를 묻는다. 내 인생 이제라도 제대로 풀어내고 싶다고 전했다. 지금까지 이름값을 치러내느라 애썼다며 위로를 건넨다. 가슴 저 밑에서 뜨거운 것이 왈칵 올라온다. 그것이 굳어있던 핏덩이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새 이름을 지어줄 순 있다고 한다. 다만, 새것에 대한 값을 치러야 한다는 비수를 꽂는다. 약만 주시든가 병까지 줄 게 뭐람. 비딱해지는 못난이가 나온다. 이제껏 피폐했는데 또 반복한다니 심통이 사나운 가시를 세운다. 새삼스레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바꿀까. 그때나 지금이나 생각할수록 그의 잣대나 기준이 확고한 것 같다. 다른 이들은 잘도 이름을 바꾸지 않던가.


카카오가 약을 올렸다. 몇 차례 도전했으나 브런치 작가는 연거푸 고배를 마신다. 잡을 수 없으면 더 목매는 심리를 움켜쥔 알고리즘이 희롱한다. 선생님의 ‘후’를 사용한 후 브런치를 맘껏 즐겼다. 디카시 공모전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채택하고선 막판에 장원에서 미끄러뜨린다. 본명 대신 ‘후’로 내밀었더니 덥석 문다. 드라마는 결말보다 에필로그에 재미난 한방이 있다. 개명해서 팔자 한번 고치려는 얕은수를 들켜 빈손으로 돌아왔지만, 내 플롯이 갈등에서 실마리를 찾았는가. 반전이 일어났다. 탈선한 궤도에 어떻게 올라탔는지 모를 결빙했던 구간이 해빙을 맞이한 것일까. 목표한 공부를 시작할 때마다 툭툭 올라오던 두더지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원하던 자격증과 몇 해 전부터 지지부진하던 석사를 드디어 마쳤다. 늘 기도하지만 날 위해 기도한 적은 가물다. 그런데도 연초에 적어둔 목표가 어느 순간 성취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아버지는 연어였다. 딸을 위해 전통을 거스른 ‘은’이란 알을 낳고 가을에 일찍 소풍을 떠나셨다. 심해 같은 사랑을 들여다보지 못한 여식은 고개를 떨군다. 그 소중한 ‘은’을 스스로 버리려 한 흑심을 씻어낼 수 있었다. 합당한 구실이란 발목 잡힌 나는 스스로 옭아맸다. 작명가는 어찌 꿰뚫어 핀셋 처방을 내렸을까. 관조할 수 있는 지금, 학자로 관심을 쏟아준 은사님과 흔치 않은 돌림자를 창조한 아버지가 떠오른다. 안 되는 것에 미련을 저당 잡히지 않고 직진할 수 있어 안도한다.


코끝이 알싸하다. 삶은 어쩌면 매운 난파선 같다. 구명보트를 타고서라도 노래를 부르자는 볼테르를 좌표 삼아 걸어가 보리라. 불행도 행복도 영원한 것은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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