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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혜은 Mar 26. 2024

Day11 : 기분 전환이 필요한 하루

feat.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Day 11



    아침에 일찍 눈이 떠졌는데 창밖이 어두워서 무서웠다. 해가 좀 더 밝아질 때까지 시간 때울 일을 생각하다가 노트북에 담아 온 영화를 보기로 했다. 침대에서 시리얼 먹으면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보고 울었다. 도망치는 뒷모습을 왜 시간이 용서해 주길 바라는 걸까. 상처받은 건 시간이 아니라 조제일 텐데. 억지로 강해져야 하는 건 시간이 아니라 조제일 텐데. 하지만 조제를 두고 떠난 그가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겠더라.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고 모두가 피해자인 상황이 있으니까.


    기분 전환 겸 에펠탑 구경을 갔다. 낮의 에펠탑은 또 새로웠는데 밤의 에펠탑이 좀 더 예쁜 것 같긴 하다. 에펠탑 앞에서 만난 한국인 분들께 사진을 부탁드렸는데 너무 열정적이셔서 좀 부끄러웠다. 대신 나도 두 분 사진 최선을 다해 찍어드렸다.



    오늘은 정말 아무 일정이 없어서 뭐 할까 생각하다가 대학 구경을 가기로 했다. 파리 정치 대학이 유명하다니까 가봐야지. 그리고 대학이 있다는 동네에 도착하자 곳곳이 ‘Science Po’였다. 캠퍼스에 경계가 없는 것이 나한테는 정말 신기했다. 반대로 이런 캠퍼스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우리나라처럼 경계가 확실한 곳에 오면 또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기도 했다. 마침 쉬는 시간인지 (얘네는 벌써 개강을 했나?) 학생들이 우르르 건물에서 건물로 이동하는 틈에 섞여 다녔다. 아마 전혀 안 자연스러웠을 거다.



    비가 부슬부슬 왔는데 현지인들은 이 정도는 신경도 안 쓰는 듯했다. 나는 찝찝했고 실내에 들어가고 싶어서 사촌동생과 가지 않는 장소 중 고민하다가 퐁피두센터를 가기로 했다. 현대미술 문외한이라 미술관 입장까지 할 생각은 없었고 그냥 건물 외관만 구경하고 카페에 있을까 했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비어서 들어가 보기로 했다. 어... 음... 정말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예쁘다/이건.. 뭘까.../무섭다. 정도의 느낌밖에 받을 수 없는 게 조금 안타까웠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의 최고봉이 현대미술 아닐까 싶었다. 난 좀 힘들었다.. 


    그리고 나와서 트립어드바이저에서 찾은 피자가게를 가려했는데 공항 마중 가는 시간도 애매하고, 가게도 못 찾겠고 해서 그냥 눈에 보이는 파니니 가게를 들어갔다. 6.5유로 세트였는데 가격대비 아주 훌륭했다! 햄 많고 치즈 많고 점원 아저씨들도 넘 친절함


    공항에서 동생을 데려와서 저녁 먹고 에펠탑 근처를 산책했다. 동행이 있으니 한국말도 많이 할 수 있고 밤에 돌아다녀도 안 무서워서 좋다. 근데 또 별로 관심 없는 곳에 들러야 하고 일정을 상의해야 하는 건 좀 별로다. 역시 장단점이 확실한 혼자여행... 그래도 즐거운 여행이 되면 좋겠다.





    지금 생각하니 동생도 성인이었는데 자유여행에 따라오겠다고 왔으면 공항에서 시내까지는 혼자 올 수 있어야 하지 않았나, 내가 왜 공항까지 마중을 나갔지, 싶은데 그때는 뭔가 이 여행의 전부를 내가 책임져야 할 것 같은 느낌이 강했다. 최근 친구와의 통화에서 '너는 남들보다 책임감을 크게 느끼는 편인 거 같아. 그러면서도 네가 느끼는 게 1.5라면 1만큼도 잘 표현을 안 하지. 네가 말하는 것 보다도 실제로 느끼는 책임감이 큰 것 같아.'라는 말을 들었었다. 그 말을 들을 때는 딱히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예전의 기록을 보니 내 인생에 책임감이 너무나도 당연한 공기 같은 거라 스스로 못 느끼는 건가 싶기도 하다. 조금 더 너 편한 대로 행동해도 된다고 스물두 살 혜은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다.


    11일 차의 일기를 읽고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다시 봤다. 예전의 나는 이 영화를 제법 아련한 사랑 이야기 정도로 기억했던 것 같은데, 그간 감성이 많이 변했는지.. 이번 감상에서는 츠네오(남자 주인공)를 흠씬 두들겨 패주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영화를 백지상태에서 보고 싶다면 이 글을 더 읽지 않기를 권합니다* 


    결말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는 영화 시작 부분 츠네오의 추억 회상이 너무 괘씸해서 짜증이 났고(아련함 뭔데.. 니나 추억이겠지), 조제(여자 주인공)가 '가란다고 진짜 가는 놈이면 빨리 가버려!' 하며 우는 장면에서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냥 영화가 여기서 끝났으면 싶었다. 조금 솔직하고 과격하게 말하자면 츠네오의 머리통이든 이걸 계속 보고 있는 내 머리통이든 뭐든 하나는 깨고 싶은 마음이었다. 달리는 자동차의 그림자가 바뀌는 것을 보고 잔뜩 흥분하는 어린아이 같은 조제에게 운전 중이니 조용히 하라고 면박을 주는 츠네오를 보며 '이 자식아 너한텐 당연한 거겠지만 조제한테는 처음 보는 광경이라고! 조제가 집에서는 요리도 하고 뭐도 하고 하지만 바깥세상에서는 아기라는 걸 알아야지! 성의 있게 대답 못해?' 화를 내고 싶었다. 그런데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나. 언니 문자에 답장이나 제대로 하고 말해라..... 츠네오를 마냥 욕할 수는 없어서 영화를 다 본 후 이번에도 입안이 썼다. 기분 전환 겸 에펠탑 구경을 가고 싶었다. 


    '휠체어 같은 건 필요 없어. 네가 평생 업어주면 되잖아.'라고 말하던 조제는 전동 휠체어를 타고 장을 본다. 조제는 나아간다. 요리를 끝내고 식탁으로 옮겨 가는 조제의 멋진 다이빙폼은 '내려오는 방법을 바꾸는 게 어때?'라는 말에도 끝까지 그대로였다. 조제가 나아가는 것은 다른 누군가의 덕분이 아니라 조제의 힘이다. 조개도 헤엄을 친다. 조개도 헤엄을 친다는 사실이 오늘의 기분 전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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