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체에 힘이 생기면 흔들리지 않는 게 아니라, 흔들리는 와중에도 나만의 중심을 잡을 수 있게 됩니다. 빈야사는 나만의 흔들리는 중심을 찾기 위한 과정이에요. "
요가 수업에서 하체를 탈탈 털린 후.. 듣게 된 한 마디가 마음에 남았다. 오늘의 나에게 참 필요한 말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일단 질러나 보자 하는 마음으로 구직활동을 시작한 게 한 달 반 정도 전이다. 별로 하고 싶지도 않은 일을 하기 위해 자기소개서를 쓰고 필기시험을 보고 온라인 AI면접을 보고 오프라인 면접 준비를 하고 면접에 가고 발표를 하고.....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채용 공고를 읽으면서 전형 과정을 상상만 해도 이미 질린다. 연차도 낼 수 없는 날이라 출근했다 외출 복무를 상신하고 면접을 갔다가 복귀해서 바로 다시 일하는 극악 일정 속에 소화해 낸 면접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고서는 다음 면접을 준비할 마음이 싹 사라져 버렸다. 괜히 대학원 홈페이지를 기웃기웃 거린다. 프리랜서로 심리검사 해석 상담만 하면 단가가 어느 정도 되는지를 검색해 본다. 카페 창업 자본도 검색해 보고, 전부터 생각했던 맛있는 커피 원두 수입도, 엽서 제작도, 여러 가지 취업 학원들도 검색어로 등장한다. 의미 없는 인터넷 서핑 후에는 이럴 시간에 면접 준비를 했어야 하는데. 하는 자괴감이 남는다.
사실 알고 있다. 이게 다 내가 나를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라는 걸. 진로상담의 기본은 자기 이해라고 배웠고 많은 성공한 사람들도 자기의 열정을 따르라고 말한다. 나도 알아 아는데. 내가 뭘 좋아하는지, 내가 뭘 잘하는지 모르겠다. 13시간씩 자기... 같은 건 잘하는데. 아무래도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건 돈을 버는 일이 아니라 쓰는 일 쪽에만 치중되어 있는 것 같아..... 이 흥미와 적성을 직업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핵심일 텐데 그게 너무 어렵다. 이런 고민은 18살쯤 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때 아무 생각 없이 지냈던 값을 28살에서야 톡톡히 치르고 있다. 잠깐 근데 정말 18살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나? 생각해 보면 또 아닌 것 같단 말이지. 그때는 심리학과 가서 심리학 공부하는 게 목표였다. 18살의 혜은이는 목표를 달성하고 꿈을 이룬 셈이다. 목표를 향해 가는 길이 하나일 때는 잘 달렸는데 목표도 직접 골라야 하고 길도 만들어 나가야 하니 망망대해에 표류하는 느낌이다. 인생은 레일 위의 레이스가 아니라는 말 굉장히 흔하고 진부한 문구이긴 한데, 스테디셀러에는 이유가 있다.
요즈음의 이러한 흔들림에도 와장창 넘어지지 않고 버텨내고 있는 이유는 냅다 하던 일을 관두지 못하는 현실감각과 책임감, 그리고 주변의 좋은 사람들 덕분이다. 나 좋자고 하는 이직 준비가 힘들다고 우는 소리를 하면 '이 악물고 이직 준비 하든가, 못 하겠으면 징징거리지 말고 하던 일 열심히 하든가'라고 말할 법도 한데.. 따뜻하게 위로를 건네주는 친구들에게 고맙다. 이 방향성 모를 흔들림들이 시간 축을 100년으로 늘려보면 점진적인 우상향 그래프를 그리고 있다면 좋겠다. 언젠가 이 시기가 꼭 필요한 나만의 흔들리는 중심을 찾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모든 고민들에도 불구하고 심리학을 전공하고 전문상담교사로 첫 커리어를 시작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학부 수준에서 어떤 학문을 전공한다는 건 전공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그 전공의 시각, 그 전공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아주 복잡하고 나약하다는 것, 정신과 약물도 감기약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생각보다 정신질환과 심리적 어려움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심리학의 세상에서 알게 되었다. 이러한 배움은 다른 사람들과 나 자신에게 조금 더 관대하고 친절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다른 전공을 공부했다면 이런 감각을 가지고 살아가기가 지금보다는 어려웠을 거라 생각한다. 전공 공부와 학교에서 맞닥뜨린 업무는 많이 달랐지만.. 그래서 더 해보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만약 첫 취업을 다른 기업체에 했다면 그 회사에서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임용고시를 선택지로 두고 살았을 것 같기 때문이다. 회사 다니다가 죽을 둥 살 둥 공부해서 옮긴 직장이 이만큼이나 안 맞았다면....... 정말 좌절스러울 것 같다. 나름대로 전공을 살려서 취업했다는 뿌듯함도 있고, 내가 가질 수 있었던 선택지 중 하나를 깔끔하게 소거했다는 점에서 후회는 없다. 유일하게 조금 후회되는 것은 문이과 선택 시점인데.... 이과에 갔으면 너무 괴로웠을 거야... 어린이 보다 어른이 고통스러운 게 맞다고 생각한다. 잘했어 18세 혜은아. 10년 후의 네가 중심 잡기 쇼쇼쇼 한 번 해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