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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혜은 Jul 10. 2024

하옥련 씨

사랑에 묻은 작은 티끌을 사랑으로 흐릴 수 있게 될까

    하옥련 씨. 옥련리에서 태어나 열여덟에 시집간 하옥련 씨. 글 쓰고 그림 그리던 남편 대신 시어른 모시고 밭일하며 품 팔아가며 4남매 키워낸 고생을 말로는 다 못한다고, 다 늙었어도 지금이 제일 좋다는 하옥련 씨. 내 글 속의 유일한 본명(本名)인 하옥련 씨. (하옥련 씨는 인터넷에 자기 이름을 검색하지 않을 테니까.) 


    서울에서 뭐 하느라 집에 한번 올 시간이 없냐는 말에 이번 주말에는 시험을 치러 간다고 했다. 학교도 졸업했으면서 무슨 시험이냐는 말에 회사 들어가려는 시험을 본다고 솔직히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휴직하고 다른 데 갔다 올 수 있는 거냐고 묻는 하옥련 씨. 


    "나는 이 일이 싫어. 관둘 거야."

    - "하이고 되도 않는 소리 하네. 가서 또 하기 싫으면 어떡할래? 이 싫증쟁이야." 


    남편은 평생 글 쓰고 그림 그렸고, 딸은 시집가서 사위와 함께 평생 소를 키웠고, 아들 셋과 며느리 셋은 평생 공무원으로 일한 하옥련 씨. 하옥련 씨가 보기에는 3년도 못 채우고 직장을 바꾸겠다는 손녀가 싫증쟁이일 수 있겠다, 머리로는 생각하면서도 마음에는 상처가 됐다. 나라고 이러고 싶은 줄 알아. 얼마나 열심히 공부해서 들어온 직장인데. 공부하면서, 면접 준비하면서 얼마나 울고 떨었는데. 나도 그냥 정착하고 싶다고. 취업준비 같은 거 더 하고 싶지 않다고. 그런데 안 되겠는 걸 어떡해. 이 일을 계속하면 공부할 때 보다 면접 볼 때 보다 더 많이 울어야 될 것 같아서 힘들게 결정한 건데. 퇴근 후에 공고를 찾고 자기소개서를 쓰고 자격증을 공부하고 필기시험을 준비하는 게 나라고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닌데. 왈칵 올라오는 눈물을 꾹 누르며 그때는  다른 하면 된다고 쏘아붙였다. 인터넷은 못하지만 세상 지혜를 많이 알고 있는 하옥련 씨가 정곡을 찔렀기 때문에 유난히 아픈 것일 지도 모른다. 직무를 바꾸기에는 나이가 어리지 않다. 이다음에는 마음을 붙여야 것이다. 다음번 일에서도 너무 힘들면 그때는 어쩌지? 그동안 말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선명한 불안이 있다. 


    하옥련 씨는 이렇게 가끔 내 가슴을 후벼 판다. 언니와 나를 비교하며 언니를 안쓰러워할 때도 그랬고, 싹싹한 남동생과 나를 비교할 때도 그랬다. '너 가만히 앉아 하는 일에 그 정도면 많이 받는거지 뭘 얼마나 욕심내냐' 할 때도 그렇고, '집에 한번 와서 쉬다 가라'할 때도 그렇다. 뭐가 쉬는 건데 대체. 주말 이틀을 꼬박 바쳐 기차를 한참 타고, 가서는 답답한 마음에 화를 내지 않기 위해 어금니를 몇 번이고 깨물어야 하는 데 뭐가 쉬는 거야 그게. 나는 이것조차 말을 못 하겠는데 '가족끼리는 좋은 얘기 말고 힘든 얘기도 하고 그러는 거다'라며 마음을 터놓기를 바라는 점까지도 그렇다.


    하옥련 씨가 바리바리 담그고 싸서 서울까지 부친 김치로 김치찌개를 끓여 먹고, 같이 들어있던 복숭아로 입가심까지 한 후에 하옥련 씨에게 너무너무 서운하다는 글을 쓴다. 하옥련 씨가 주는 사랑에 비해 내 사랑이 너무 모자란 걸 알아서 또 눈물이 난다. 하옥련 씨가 평생 나에게 건넨 사랑에 비하면 '싫증쟁이야'라는 한 마디는 참 작은데. 그것 하나 상계하지 못하는 내 비좁은 마음과 이기적인 계산이 싫다. 결국 내 마음의 문제로 돌아온다. 하옥련 씨 나이만큼 살다 보면 사랑에 묻은 작은 티끌을 사랑으로 흐릴 수 있게 될까. 그랬으면 좋겠다. 군데군데 흐린 점을 사랑의 무늬로 생각하며 상처받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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