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처녀 성장 소설
퇴근길, 차 안에서 습관처럼 라디오를 켰다. 딱 차 안에서만 듣는 라디오. cbs와 kbs만 오가며 듣는다. 근데 평소 듣던 목소리가 아니다. '퇴근이 평소보다 한 시간쯤 늦어서 그런가?' 했는데 이 시간 퇴근 때도 못 듣던 목소리. 박준 시인이라고 했다.
우와~ 이제 시인이 디제이도 하네. 글이 너무 좋아 나도 참 좋아하는 시인이다. 이제 시집도 잘되고 점점 더 잘 풀려 다행이다 싶었는데, 목소리를 들어보니 그럴법한 목소리였다.
난 6살 때부터 음악을 하며 소리에 민감한 삶을 살다 보니, 소리를 상업적으로 다루는 일을 하다 보니, 음악뿐 아니라 사람의 목소리에도 무척이나 민감하다. 목소리를 들으면 그 사람의 성격이나 지나온 삶이 어느 정도 예측이 될 정도로. 물론 그간 쌓인 경험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그냥 개인적 판단일 수 있겠다만, 일을 할 때도 사람을 만날 때도 그건 인상이나 관상처럼 은근 정확히 맞아 들어가 도움이 된 적이 많았다.
박준 시인의 목소리는 꽤 호감과 신뢰를 주는 좋은 음성이었고, 살짝의 아련함과 수줍음도 묻어있어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울림이 있었다. 음...'첫 시집엔 힘든 가난들이 가득했던 기억이 있는데, 목소리를 들으니 계속 가난한 시인으로 살 사람이 아니었구나.'
아~ 그래서 잘 되었구나, 앞으로도 잘 되겠구나~ 싶어 다행스럽기도 했다.
오전 11시 cbs영화음악을, 12시의 편안한 생생 클래식을, 저녁 6시 세상의 모든 음악을 만나면 운전하는 그 길이 더 좋아 일부러 그 시간대를 맞춰 운전을 할 때도 있다. 집에서 앱으로 들어도 되겠다만 그건 또 맛이 안 난다. 밤 12시에 새롭게 만난 낯선 목소리. 프로그램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 게, 멘트 상으론 어쩜 오늘 시작한 것 같기도 하고...(좀 전에 찾아보니 딱 첫 방송을 어제 내가 들은 것이었다.)
이젠 11시 전에는 퇴근해야지~ 하던 생각에서 12시쯤 갈까? 뭐 이럴 것 같기도 한 게, 집 지하주차장에 도착했는데도 잠시 내리지 않고 좀 더 듣다 올라왔다.
이렇듯 좋은 것들은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움직임을 만들고 행동하게 한다. 난 그게 좋은 것들의, 좋은 컨텐츠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문화와 예술은 그런 사명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최소한 나라도 그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누군가의 생각을 움직이고, 그들의 행동을 이끌어내는 사람들. 그리하여 더욱 좋은 생각을 담아 좋은 영향을 끼쳐야 하는 사람들. 아름답고 무용한 것들이 아닌 아름답고 유용한, 아니 우리 삶에 꼭 필요한 것들로 세상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문화 예술 종사자들이라고 생각한다.
코로나 여파로 다들 힘들지만 문화 예술 쪽 타격도 말이 아니다. 각종 공연과 전시가 취소되고, 영화관들이 문을 닫고... 하지만 곳곳에서 많은 이들이 자신의 작품과 재능으로 세상을 위로하는 좋은 움직임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희망을 리필해주고 있어 감사하기도 한 요즘이다.
얼마 전, 아내의 둘째 임신 소식에 좋아할 수만은 없어 힘들어하던 한 시인의 글을 읽고 쓸쓸해진 적이 있다. 부디 좋은 것들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계속 그것들을 성실히 만들어낼 수 있는 여건과 건강한 환경이 제공되어지길 바래본다. 아~! 무엇보다 일단 정상적인 생활이라도 할 수 있게, 이 코로나 사태가 속히 진정되길 진짜진짜 간절히 바래본다.
박준 시인 라디오 이야기를 하다 코로나까지 와버렸다. 그냥 차 안에서 핸드폰에 토토독~ 끄적였더니..ㅎㅎ
뭔가 시인의 이름을 꺼내었으니 그의 문장이라도 살포시 몇 자 적고 끝내야 예의 일 것 같아서 내가 밑줄 그었던 문장 하나를 적어본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같이 울면 덜 창피하고 조금 힘도 되고 그러겠습니다."
- 박준,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