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복선과 맥거핀의 총합
불과 3일 전이었다. 보일러실 문을 열지 않기로 결정한 건. 아니, 열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결심한 건. 터무니없이 좁은 집에서 침대를 옆집을 피해 놓으려면 방법은 보일러실 쪽으로 붙이는 방법밖에 없었고, 그렇게 나는 보일러실 문을 열지 못하게 되었다.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설마 했던 그 일이 벌써 일어나고 말았다. 3일 전 친구가 했던 말, "너 보일러실 들어갈 일 분명히 생긴다." 그 말은 한 귀로 흘려 들어서는 안 될 인생의 교훈이었던 것이다. 오늘 다시 한번 배운다. 정말로 삶이란 복선과 맥거핀의 교차와 반복임을 깨닫는다.
이것은 정말 몇 시간 전의 일이다. 밥을 사들고 집에 돌아온 나는 문 앞에 한 장의 종이를 발견한다. 다름 아닌 관리사무소에서 온 안내문 겸 요청문이었다. 보일러 동파를 예방하기 위해 갤러리창을 닫아달라는 내용이었다. 당황스러웠다. 보일러실 문 열려면 (개)고생해야하는데...? 근데 그보다 먼저 뇌리를 스친 것은 '나 닫았는데?'
사실 이 공지사항은 무척이나 익숙한 것이었는데,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할 무렵부터 엘리베이터 게시판과 단지 내 방송을 통해 지속적으로 알려왔던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내가 신경 쓰지 않았던 이유는 "이미" 닫았으니까!
보일러실의 갤러리 창문은 진작에 닫았다. (아니, 닫았다고 생각했다.) 에어컨을 더 이상 틀 일이 없어지자마자, 마치 옷장에서 겨울 옷을 꺼내고 여름옷을 넣어두는 연중행사를 진행하듯이 갤러리창을 닫았었는데. 거기다 더 황당한 건 침대로 보일러실 문을 막기 전에 문을 열어서 확인하기까지 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갤러리창이 닫혀있지 않아서 붙여진 안내문이란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닫았다'는 확신에 찬 내가 할 수 있는 첫 번째 의심은, 안내문의 오발송이었다. 이 의심에는 '보일러실 문을 열기 위해 침대를 옆으로 옮겨야 한다는 수고'를 제발 덜고 싶은 마음이 98퍼센트 정도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보일러실 문을 열어서 확인해 보면 그만일 일이었으나 지금으로서는 나의 '닫았음'을 의심은 것보다 의심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훨씬 '편한' 일이었다.
1분 정도를 가만히 서 있었다. '우두커니 서 있었다.'라는 문장이 실재가 되면 아마 좀 전의 나 일거다. 서서 내가 막아놓은 보일러실 문과 그 옆의 침대를 노려보던 나는 결국 문을 열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뭐.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고 진짜 그놈에 '혹시나'하는 마음에 열 수밖에 없었다.
발로 쭉 밀어서 밀리면 좋겠지만 침대는 밀려도 밑에 깔판은 밀리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좁은 집에서 맥시멀로 살려는 주제 모르는 짓을 하다 보니, 살림살이는 거의 '테트리스'처럼 배치되어 있다. 침대를 조금 미는 일이 왜 이리 힘든지. 문을 완전히 열도록 하려면 진짜, 구조 바꾸기 수준으로 주변의 것들을 모두 옮겨야 해서 문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만 침대를 옮겼다. 닫았다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아니 그런데 이게 웬걸. 덜 닫혀 있었다. 닫은 게 맞긴 했다. 닫았다고 착각할 정도로 거의 다 닫혀있긴 했다. 아래쪽은 완벽히 닫혀있는데 위쪽은 닫을 때 끝까지 힘을 주지 않았었는지 아주 조금 열려있었다. 망연자실의 순간이었다. 팔을 뻗을 수 있을 정도까지는 문이 열려야 하니 이 침대를 더 옆으로 옮겨야 한다는 생각에 아찔하면서, 정작 나도 덜 닫아놓고선 지금까지 방송 나올 때마다 '누가 아직도 창문 안 닫냐'며 무명의 다수를 아니꼽게 생각했던 내가 부끄러워진 것이다.
처음에 확인하려고 조금만 열리도록 해둔 그 틈으로 팔만 뻗어서 어떻게 해보려다 끼여서 못 나올 뻔했다. 옮기고 문 열어보고를 거듭 반복한 후에야 닫을 수 있었다.
다시 침대를 보일러실 옆으로 옮기며 생각했다. 앞으로도 '혹시나'의 근성을 버리지 말자고. 그리고 '혹시나'의 수식을 다른 데에도 널리 적용하자고. 다른 사람들도 혹시 몰라서 그런 것 아닐까, 그때 그 친구의 말을 혹시 내가 오해한 건 아닐까... 그게 무슨 일이든 너그러워지자고. 100에 가까운 확신은 사실 복선이 아니라 맥거핀일 수 있으니까.
해당 브런치북(과 글들은) 수정을 거쳐 <6.5평 월세방을 짝사랑하는 일>로 독립출판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