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야 해서 보일러실을 포기했다.
서울에 산다. 이 동네로 이사 온 지는 6개월쯤 되어가는데, 이전에 살던 곳만큼이나 소음이 심각하다는 걸 깨달은 건 몇 달 전부터였다. 경험상으로는 '창문을 닫기 시작하는 계절'이 도래하면 내부로 흘러들어오는 소음을 감각하게 된다. 이번에는 코로나 19 때문에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져 훨씬 빨리 느끼게 된 것도 같다. 어린 시절에는 외부 소음이 없는 것이 최고인 줄만 알았다. 지금은 외부 소음으로 이웃으로부터의 소음을 감출 수 있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외부의 그것은 가끔씩 백색 소음이 되어주기라도 한다.
사실 이 오피스텔이 얼마나 다닥한 모양으로 지어졌는 지를 생각하면, 우리 '집'으로 소음이 흘러들었다고 말하기도 민망하다. 이 공간의 양쪽 벽은 그 부실함을 생각할 때 절대 '집'의 외벽답지 않으므로, 소음의 입장에선 넘나드는 것이 당연할지도 몰랐다. 예전 집에서 지금보다 훨씬 심각한 소음을 경험했기에, 심지어 쿵쿵거리는 소리일지라도 옆집의 것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웠기에, 이 곳에서 어느 정도의 소음은 예민하지 않게 받아들이려 애썼다. 어쩔 수 없는 것임을 통감하면서. 나 또한 모르는 사이 누군가에게 이러한 고통을 줄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런데도 엊그제는 참 힘들었다. 주로 1인 가구가 사는 주거 공간에 2인 이상으로 채워지기 시작하면 문제가 생긴다. 대화 소리가 벽을 타고 들어와서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분노에 차올라 벨을 누를까 싶다가도 이 기분으로 무언가를 했다가는 상대에게도 나에게도 득 될 것이 없다 싶어 마음을 접었다. 그러다 잠이 들기 시작했을 무렵에 갑작스럽게 활발해지는 대화 때문에, 잠이 들었다가 깼다를 세 번 정도 반복하고 나서야 잠에 들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나는 다음날 "생존적 방 구조 변경"을 시작하게 된다. 월세살이에 방음 시공도 무리인 데다가, 분쟁조정센터가 있을지언정 제대로 된 해결은 얻을 수 없는 현실에서, 할 수 있는 건 "있는 가구로 벽이라도 막아보는 것"이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구조 바꾸기를 꽤나 자주 하는 사람이다. 그럴 때마다 나름의 철칙이 있었고, 기준이 있었으며, 그 철칙과 기준을 이유로 이것을 '취향'의 문제라고 여겼다. 이번 구조 바꾸기로 그것의 생명력은 끝났다. 이제 더 이상 나의 방은 취향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다. 삶을 위해서 움직인다.
언제나 무언가를 선택하면 무언가를 잃는 인생의 모순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생존적 방 구조 변경"도 그러했다. 가구를 양 옆에 배치하기 위해서는 침대가 중간에 와야만 했다. 가장 포기할 수 없는 무언가를 선택하기 위해, 나는 '침대를 가운데 두는' 비범한 선택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겨울이라 창문 밑에는 가고 싶지 않았건만... 그 철칙은 그렇게 깨진다. 머리를 반대로 두고 양말 신고 자자며 스스로를 위로하며 두 번째 결정에 이르렀다.
그것은 바로 '보일러실 문을 열 수 없더라도 그쪽으로 침대를 붙여 오른쪽 벽면과의 공간을 확보하는 것'. 유난스러운 '혹시나'인간인 나는, '혹시나'의 사태를 염려하는 것이 지금까지 인생의 대부분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만큼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는 데 습관이 들었다. 그런 내가 '혹시나 보일러실의 문을 열게 되는 사태'를 포기하게 된 것이다.
침대를 가로로 창문 옆에 붙이면 보일러실 문을 열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가져보긴 했다. 한 5분 정도 생각하다가 끙끙거리면서 직접 옮겨보고 나서야 말도 안 되는 일임을 깨달았다. 길이 감각이 없으면 이렇게 몸이 고생한다. 애초에 그만한 공간이 없었다. 침대를 가로로 붙인다고 하여도 보일러실 문은 여전히 열 수 없으며, 보일러실 옆에 튀어나온 벽이 있어 침대가 들어가기에는 작다. 그렇게 나는 좁은 공간이 더 좁아 보일 수밖에 없는 '침대를 중간에 세로로 놓는' 결정을 하게 된다.
그리고 남아있는 모든 소가구들을 최대한 옆쪽으로 붙이는 각고의 노력을 한 후에야, 생존을 위해 방 구조를 바꾸는 일이 마무리되었다.
들숨날숨 몰아쉬며 천장을 보고 있노라니, 얼마 전 읽은 소설 한 편이 생각났다. 소설집 <<시티픽션>>에 실린 임현 소설가의 <고요한 미래>는 신축 공공임대아파트로 이사한 주인공이 이사 후부터 불면증에 시달리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안방의 천장을 바라보고 가만 누워 있으면 정신이 자꾸 맑아지는 것이었다. ... 그때마다 나는 이 집 안에 나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분이 들었다. 오로지 나 혼자만의 공간이 침해받고 있는 것 같아 불안했는데 머리를 감거나 책상에 가만 앉아 있을 때 더욱 그랬다. ... 그러니까 진짜는 뭐가 있으면 어떡하나. 눈에 보이지 않고 소리도 없는 그것이 지금 나를 노려보고 있는 거면 어쩌지. p.194~p.195
그럼에도 비슷한 수준의 주거공간과 비교해 이것저것 비용을 따져볼 때 제법 괜찮은 조건이었으므로 이 정도의 불편은 마냥 참고 견뎌야 하는 거라고 암묵적으로 합의된 일일지도 몰랐다. p.196
그는 혹시 그것이 건물 구조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하다가도 다른 이유들의 가능성을 열어두기도 하고, 원인을 찾기 위해 전문가와 상담을 받기도 한다. 그러다 그는 당장의 잠을 해결하는 일에 몰두하기로 한다.
친구는 "너 분명히 보일러실 들어갈 일 생긴다"며 타박을 줬지만 어떡하겠는가? 그건 그때 일이고 오늘은 자야만 한다. 나도 당장의 잠을 해결하는 일에 몰두해야만 했다.
(..)
친구의 저 말이, '그건 그때 일'의 그때가 벌써 다가와버렸습니다...
https://brunch.co.kr/@blessedvine/21
*해당 브런치북(과 글들은) 수정을 거쳐 <6.5평 월세방을 짝사랑하는 일>로 독립출판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