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만개해 꽃비가 흐드러지게
날리던 어느 봄날이었다.
네 살짜리 둘째가 어린이집에서 돌아와
입안 가득 간식을 오물거리며 그날의 일을 재잘거렸다.
그날은 유난히 평화로운 오후였다.
거실창 밖으로는 개천을 따라 늘어선 벚꽃나무들이
바람에 흩날리며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였다.
나는 그 장면에 취해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아들의 목소리에 이끌려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평소 같으면 받지 않았을 텐데 전화번호 앞자리의
강원도 지역번호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왠지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여보세요?”
“김○○님 보호자분 되시죠? 따님 맞으신가요?”
낯선 여자의 목소리.
“네, 그런데요. 어디시죠?”
“여기는 원주 ○○병원입니다.”
순간 걱정보다는 체념이 먼저 밀려왔다.
‘또 무슨 일일까…’
이제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건 곧 내 일이었다.
내가 짊어져야 할 일 감당해야 할 무게.
그 사실이 늘 숨을 막히게 했다.
“얼마 전 김 00님이 저희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으셨어요. 자궁경부암 0기, 자궁 상피 내 암종이 진단되셨습니다.
수술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지만 어머님께서 설명을 잘 이해하지 못하셔서요. 따님께서 함께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전화를 끊자
주방 불빛 아래로 내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식탁 위엔 아직 다 먹지 못한 아들의 과자가 흩어져 있었고
바깥 창에는 여전히 벚꽃 잎이 부서지고 있었다.
내 입에서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곧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은정아, 이게 무슨 말이야? 내가 암 이래? 자궁을 왜 떼내라는 거야? 그 젊은 의사년 이 뭘 안다고 막 떼어내라고 하냐! 나 무서워 죽겠어 어떻게 하면 좋니?”
엄마의 목소리는 울먹임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엄마, 걱정하지 마. 아직 암 아니야. 그냥 두면 암이 되는 거래. 지금 발견해서 다행이야. 치료만 잘하면 괜찮대.
엄마 나이 땐 자궁 없어도 괜찮대.”
나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천근만근 피로가 밀려왔다.
사실 엄마는 나에게만 강했다.
눈물 많고, 겁도 많고, 세상에 의지할 곳이 없었으니까
늘 나에게 기대야 했고 나는 엄마에게
평생 등을 내어주어야 했다.
엄마가 내게 기대면 나는 다시 허리를 곧게 세워야 했다.
엄마가 무너질까 봐, 나까지 울 수 없었다.
가끔 엄마가 다른 데서 난 화를 나에게 풀 때가 있었다.
"엄마는 왜 나한테 그래? 내가 화나게 했어?"
“그럼 너 말고 누구한테 그래? 너는 내 딸이니까 그렇지.
내가 낳은 내 딸이잖아.”
그 말은 늘 상처였다.
‘너는 내가 낳은 딸이니까'
그건 언제나 엄마의 면죄부였다.
엄마가 낳았으니 나는 엄마의 소유물이고 언제나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뜻처럼 받아들였다.
그러나 엄마는 사실, 지독히 가난한 집 막내딸로 태어나 사랑도 이쁨도 받지 못하고 가까운 사람들의 숱한 죽음과 남자들을 만나도 펴지지 않는 지독한 팔자에서 겨우 버티며 나하나 마음으로 의지하고 살았을 엄마. 그런 엄마의 삶이 뒤늦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제야 알 것 같다.
그 말 안에는
“나는 이제 너밖에 없다”는 고백이 숨어 있었다는 걸.
결국 나는 엄마를 원주에서 모셔와 자궁 적출 수술을
받게 해 드렸다.
엄마는 병실 안 침대 위에서 작고 약해 보였다.
하얀 시트 사이로 드러난 엄마의 손등은 마른 가지처럼 앙상했고 그 위로 떨어지는 수액방울 소리만 병실에 맴돌았다.
엄마는 그저 나를 바라봤다.
겁에 질린 눈, 어린아이 같은 얼굴.
그제야 깨달았다.
평생 강한 줄만 알았던 엄마는
사실 세상에서 가장 약한 사람이었다는 걸.
수술 후 엄마는 우리 집에서 회복했다.
물론 여전히 아들과 엄마 사이에 낀 나는 양쪽을 돌보느라 정신이 없긴 했지만 엄마의 약한 모습과 내 아들처럼 내가 돌보지 않으면 어린아이 같이 겁 많은 엄마가 세상을 견디며 살아온 시간이 같은 여자로서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거실 창가에 앉은 엄마가 벚꽃이 져버린 가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봄도 다 갔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대답했다.
‘엄마, 이제 곧 우리에게도 봄이 올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