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명절이 되면 나는 엄마, 엄마는 딸이 되었다.

by 은나무


그래도 명절이면 나는 딸이었다.

아니 엄마 같은 딸이 되었다.



이 세상에서 엄마 곁에 유일한 피붙이는 나 하나다.



엄마는 다섯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가장 가깝게 지내던 바로 위 언니가 있었는데
엄마가 국민학교 고학년 나이쯤 되었을 때 서울로 돈 벌러

간 언니가 우울증에 걸려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언니는 결국 엄마와 함께 지내던 방에서

약을 먹고 세상을 떠났다.
엄마 말로는 그때 언니가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

눈을 감았다고 했다.



그 일은 어린 엄마에게 너무 큰 충격이었다.
그 뒤로는 늘 무표정했고 아무리 맞아도

울지 않는 아이가 되었다고 한다.
할머니 대신 집안을 이끌던 두 오빠는
말 안 듣는다고 엄마를 자주 때렸고
그때부터 엄마는 “나는 혼자 살아야지” 하는 생각을 마음에 품었다고 했다.



엄마가 스무 살이 되던 해
그나마 남아있던 부모님마저 사고로 동시에 돌아가셨다.
그 어린 나이에 세상에 혼자 남게 된 거다.
오빠, 언니가 있었지만 각자 먹고살기 바빴고
막내 동생을 챙길 여유는 아무도 없었다.



엄마는 그 외로움 속에서
'빨리 안정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결혼을 했다.
그 결혼에서 세 아들을 낳았는데
셋 다 돌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엄마는 그 죄책감에 첫 남편에게서 도망치듯 이혼을 했고
이후 나의 친아빠를 만나 나와 남동생을 낳았다.
하지만 남동생을 낳고 얼마뒤 아빠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그 자리에서 바로 세상을 떠나고 엄마혼자 젖먹이 둘을 데리고 일하기 힘들었기에 남동생은 입양을 보냈다.


그렇게 엄마는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아무 도움도 주지 않으면서 상처만 남긴 언니 오빠들과도 연을 끊고 결국 엄마와 나는 세상에 단둘이 남았다.



엄마는 나와 같이 살진 않아도
명절만큼은 꼭 함께 보내자고 했다.
결혼 전엔 늘 내가 사는 원룸으로 엄마가 왔다.



나는 명절이 다가오면 며칠 전부터 장을 봐놨다.
잡채거리, 고기, 각종 나물, 전, 과일들까지.
엄마가 잡채를 유난히 좋아했기 때문에
둘이 먹는데도 나는 잡채 20인분은 만들었다.
양념에 재워둔 고기 냄새가 방 안에 퍼질 때면
왠지 마음이 훈훈해졌다.



엄마가 오면 나는 부엌에서 정신없이 움직였다.
전 부치고, 나물 무치고, 밥상을 차리고.
엄마는 옆에서 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은정아, 그래도 우리 둘이라도 명절은 명절답게 지내자.”



그때만큼은 오붓한 모녀였다.
나는 엄마에게만큼은 제대로 된 딸이 되고 싶었다.
엄마가 돌아갈 때면 냉장고 속 음식들을 챙겨
가방 가득히 싸주고 집 안에 있는 쓸 만한 물건들
그리고 용돈까지 두둑이 쥐여주며 배웅했다.
그때마다 마음이 뿌듯했다.



사람들이 “엄마랑 딸이 바뀐 거 아니냐”라고 농담했지만
뭐 상관없었다.
세상에 나를 낳고도 버리지 않은 사람.
나를 입양 보내지 않고 곁에 둔 사람.
그게 내 엄마였으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마저도 고맙다.
그게 엄마 나름의 사랑이었다.



결혼 후에도 엄마는 여전히
명절이 되면 내게로 왔다.
엄마 집은 좁아서 우리가 가면 앉을자리도 없었기에
엄마가 우리 집에 며칠 머물다 가는 게 자연스러웠다.



혼자 살 땐 괜찮았는데 결혼하고 나니
엄마가 오면 공기가 달라졌다.
아들은 나를 찾고 엄마는 그걸 질투했다.
가운데 낀 나는 늘 조마조마했다.
아들 달래고 엄마 달래고.
다른 며느리들이 시댁 스트레스를 말할 때
나는 ‘엄마 스트레스’로 병이 날 지경이었다.



그래도 명절인데,
세상에 혼자 남은 엄마를 혼자 둘 순 없었다.
내 마음에 병이 생기더라도
이번에도 참자, 희생하자, 그렇게 생각했다.
언젠가는 엄마도 내 마음을 알아주겠지
그 믿음 하나로 매년 명절을 버텼다.



이제 나는 시댁에서도 엄마에게도
적당히 거리를 두고 간단하고 편한 명절을 보내는

며느리, 딸이 되었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는 늘 남는다.



명절이 오면, 왠지 모를 헛헛 함이 엄마를 외롭게 한다는 걸 아니까....

keyword
이전 13화상처는 여전히 진행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