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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누크 Feb 17. 2020

회식

오늘은 본부장님과 부서의 책임역들이 저녁을 먹는 날이었다.

열 명이 안 되는 인원이 오붓하게 가지는 저녁자리지만 어쨌든 고깃집에서 소맥과 함께하는 전통적인 회식 자리였다. 2~3시간에 걸쳐 적당히 이야기하고 웃고 화기애애하게 회식을 한 후 정확히 9시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헤어졌다. 나는 잘 모르지만 새로운 본부장님은 원래 늦게까지 마시는 스타일은 아니라고 한다. 그렇지만 술을 좋아하는 분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공교롭게도 오늘 자리에서 그분과 일을 해본적이 없는 사람도, 술을 못 마시는 사람도 나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관전을 하다가 집에 올 수 있었다.

사실 나는 조용히 관전하는 걸 좋아하는 타입이 전혀 아니다. 사람 만나서 신나게 수다떠는 걸 좋아하고 조용히 듣기보다는 분위기를 좋게 만들고 띄우는 역할을 하는 걸 오히려 좋아한다. 그렇지만 본의 아니게 술을 체질상 아예 못하고 취향이 그렇게 대중적이지 않다보니 회사생활을 하면서부터는 평범하게 주류의 길을 가는 것이 힘들었다. 처음부터 개성이 강하고 생각이 깊고 내실을 기하는 외유내강 스타일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으랴만, 난 그냥 어리고 들떠있는 발산형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회사 생활 초반에 참으로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회식만 갔다오면 위장이 아프고 기분이 좋지 않아서 항상 힘들었다. 그때는 강권하는 걸 좋게 좋게 계속 넘겨야 했고 그마저도 억지로 마셨다가 두통에 불면에 고생을 해야했다. 그 단계가 넘어가자 더 이상 권하지는 않는데 그때부터는 꿔다놓은 보릿자루마냥 존재없는 관람객으로 몇 시간이고 때워야만 했다. 묘하게도 우리나라의 술 문화는 공격적이어서 술을 마시며 체력과 기싸움을 하는걸 떠나서 그 자리의 대화나 분위기도 공격적인 데가 있었다. 대화나 웃음도 소위 말하는 서로 갈구고 받아치는 코드였는데 난 도무지 그게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술자리의 화제는 대부분 내가 관심없는 것들이었고 그렇다고 내가 가무에 능해서 그 방면으로 존재감을 빛낸 것도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그렇게 조용한 부류의 트랙으로 계속 길을 걷게 됐다.

이제 십년쯤 지나다보니 예전 빛나는 별처럼 여기저기서 날렸던 여군들이 다들 출산과 육아, 휴직 등으로 이리저리 사라지고 이런 술 문화가 확실하게 주름잡던 지금의 이 부서에도 나같은 비트랙인들이 조금씩 끼어들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회식자리를 보면 모두가 한 가닥 하던 분들이라 난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이제는 강권이 없을 뿐더러 조용하고 배려하는 분위기에서 아주 조금만 예전 술자리의 분위기를 내면서 이야기하고 일정 시간이 되면 자리를 끝내고 일어선다. 각자의 취향과 바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사람들은 적응이 빠르다.

문화가 바뀔 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나는 비로소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몸에 안 맞는 술을 억지로 눈치보며 조금씩 시늉내는게 아니라 아예 못 마신다고 패스해버리고, 그냥 맘먹고 두 세시간 정도 조용히 관전모드로 있다오자-라고 마음을 정리한 게 얼마 안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뒤끝이 살짝 안 좋은 것은 그들만의 리그를 구석에서 계속 구경하다가 집에 가는 것이 마음 속까지 완전히 편하지는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도 이래저래 많이 빛이 바랬지만 예전 영광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회식을 하고 집에 오다보니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것을 느꼈다. 사실 이 시대와 우리나라, 그리고 우리 회사의 주류의 규칙도 잘 알고 있었고 그쪽과는 여러 모로 내가 다르다는 것도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거기에 굴하지 않고 나답게 내 길과 내 자리를 찾아서 걸어가는 게 그토록 어려웠다. 대개 주어진 틀 속에서 작은 선택만을 하면서 순종적으로 살아온 내 에너지와 그릇의 결과가 이것이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조금 오래 걸릴 수도 있지 하면서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너무 착착 들어맞는 멋진 삶을 사는 것보다도 좀 뒷북 같지만 엉뚱한 시기에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도 재밌을 거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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