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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누크 Mar 10. 2020

긴 인생을 살아가는 법

나는 책 많이 보고 바깥활동이나 현실적인 거에 관심없이 살았던 족속이라서 취업 때에 애를 많이 먹었다. 게다가 약하고 예민한 체질이다보니 더욱 선택지가 줄어들어서 결국에는 가장 안전하고 방어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다. 그것도 운이나 따라줘서 겨우 취업을 하게 되었는데 나름대로는 남들이 부럽다고 하는 굉장히 현실적이고 안정적인 직장이었다. 한번 승선을 하고 나자 원래 생긴거에 맞게 주어진 대로 일 하면서 나와 매우 달랐던 평범한 직장생활과 사람들에 적응해가면서 그렇게 꾸역꾸역 생활하고 있다. 

적성도 취향도 잘 맞지 않았고 그리 대중적인 스타일이 아니다보니 항상 묘하게 마이너로 조용히 살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다른 길을 알아보거나 헤쳐나가는 수완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사실 그런 성격이었으면 애초에 다른 길을 갔을 거 같긴 하지만..

어쨌든 재밌게도 가장 안정적인 직장에 와서 먹고 사는 걱정이 해결되고 나니까 내가 그것 때문에 포기했던 다른 것들이 귀신같이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십년이 넘은 지금 나는 몸도 마음도 많이 안 좋아진 상태다. 그렇다고 휴직을 할 사유도 없고 하루하루를 지탱해 줄 의미도 성취감도 소소한 사람간의 재미도 없다.

권태와 외로움. 인생을 살아가면서 부딪치고 극복해야 할 가장 큰 두 장애물이다. 사실 그것 때문에 막연하게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갖고 또 나와 잘 맞는 사람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어렸을 때부터 많이 기도를 했었는데 그건 막연한 기도로 끝나고 말았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했는데 역시 난 노력이 부족했던 것일까.

수동적으로 방어적으로 살다보니 이제 그 결과가 너무 무섭게 돌아와서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괴로워하고 있다. 

당장 생계의 문제가 걸린 사람들이나 혹은 집안일과 육아로 반 우울증 상태가 된 사람들은 이걸 사치스러운 고민이라고 할 테지만 어찌 보면 아이를 낳는 것조차도 긴 인생의 공백을 채우기 위한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어서 그 길을 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 보편적인 길을 가지 않는다면 그 곳을 대체할 수 있는 다른 컨텐츠가 있어야만 하는게 분명하다. 혹은 일본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혼자서 조용히 작은 취미와 반복적인 일상 속에서 욕망도 괴로움도 죽인 채 담담하게 살아야 한다. 

어렸을 때 상상했던 것과 인생은 너무나, 너무나 다르게 펼쳐져 간다. 이렇게 고인 물처럼 색깔 없이 펼쳐지는 게 인생일 거라고는 정말 상상하지 못했다. 동생들에게 후배들에게 이야기할 기회가 생긴다면 난 꼭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적극적으로 생각해보고 용기있게 선택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내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적성과 커리어를 버린 건 아니지만, 그 선택을 두고두고 곱씹어 보게 할만큼 사람에게 일은 중요하다.

내가 타고난 재능, 잘할 수 있는 것, 기여, 성취, 그것은 곧 내가 존재하는 의미가 맞다. 그래서 여러 철학가들이 노동의 중요성을 설파했고 종교에서 소명이라는 개념으로까지 등장했다.

그렇게 관계에 영향을 많이 받고 사람에 목말라했던 나도 이제는 그에 앞서 나의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주말의 불면과 고민이 헛된 것이 아니라 아주 조금이라도 전환점에 가까이 가는 과정이었으면 좋겠다. 구하는 자에게 길이 열리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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