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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누크 Nov 01. 2020

홍대입구, 밀로커피

단발성의 시대에서 오래 살아남는 것

커피가 잘 받는 체질은 아니지만 그 문화와 분위기가 좋아서, 그리고 내가 사는 이 시대에 일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나 커서 이래저래 많이 접하기도 하고 알아보기도 했다. 처음에는 공간이 주는 분위기를 주로 즐기며 다니다가 언제부터인가는 커피 자체에도 호기심이 생겨서 이것저것 알아보고 마셔보기도 했다. 

십년 전 대학생 시절만 해도 '바리스타' 라는 개념이 있는 전문 커피집은 서울에 많이 없었다. 주로 구시가지의 분위기 있는 동네에 한 군데씩 있어서 그야말로 취향 좀 있는 사람들이 만나면 일부러 알아두었다가 찾아가는 정도였다. 그런데 그간 커피 문화는 너무나 빠르고 넓게 확산되어 지금은 십인십색의 수없이 많은 카페들이 동네마다 자리잡고 있다. 좋은 곳을 하나씩 찾아가는 재미를 넘어서서 아마 다 가보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가 됐다.

얼마 전 커피 자체에 관심을 가지게 됐을 때 가까운, 그리고 멋진 장소가 빼곡하게 몰려있는 홍대 지구의 좋은 카페들을 찾아서 한번씩 다녔던 적이 있다. 그 수많은 곳 중에서 유독 이 업계의 스승님 같은 포스를 자랑하는 곳이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밀로커피 로스터스였다. 남편이 좋아해서 자주 갔었던 합정의 퀜치커피도 이곳에 계시던 분이 독립하여 차린 곳이었다. 원두와 로스팅에서부터 메뉴, 그리고 커피잔들까지 뭐 하나 가볍게 보기 힘든 그런 느낌의 곳이었다. 문화 잡지의 특집 인터뷰에 나올 것 같은 그런.

아마 역사도 꽤 오래 된 것 같다. 밀로커피는 홍대입구역 가까이 얼핏 보면 좀 어수선한 앞쪽 골목에 조용히 자리하고 있다. 왠지 좀 더 떨어진, 조용하고 분위기있는 골목에 있어야 할 것 같은 이곳은 아마 홍대지구가 합정, 망원, 연남으로 넓어지기 한참 전에, 홍대가 정말 홍대입구 중심으로 돌아가던 그 시절에 자리잡았던 게 아닐까.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 테이블들이 놓여 있고 카운터 쪽으로는 벽면 전체에 원목 선반이 짜여 있고 아름다운 커피잔들과 도구들이 정갈하고 빼곡하게 놓여 있다. 따뜻하고 차분한 분위기와 조용한 장인의 느낌을 주는 주인장님을 보면 마치 일본의 한 커피전문점에 온 느낌이다.

드문드문 두 세 번을 가서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비가 주륵주륵 오는 늦가을 일요일인 오늘, 신촌에 일이 있어 나갔다가 죽 걸어서 이곳으로 향했다. 커피나 한잔 마시고 들어갈까? 하는 남편의 말에 나는 밀로커피와 테일러커피를 떠올렸다. 오늘은 이곳이 오고 싶었다. 그래서 찬 공기를 마시며 홍대를 지나 걸어왔다. 변함없는 모습으로 카페는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역시 자리는 절반 이상 꽉 차있었다. 우리는 인기 있는 메뉴인 몽블랑 두 잔과 마들렌을 주문해서 여유롭게 창밖을 바라보며 늦은 오후를 즐겼다. 

남편은 요즘 빠져있는 유튜브 이야기를 계속 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관심사와 반응에 대해서, 그리고 조회수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다 보니 새삼 오래 자리를 지켜가는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모든 종류의 컨텐츠도 서비스도 제품도 갈수록 짧아지고 있다. 하나를 오래 쓰지도 않고 오래 즐기지도 않는다. 컨텐츠는 점점 더 짧게, 단순하고 자극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어떤 것을 시작해도 결국 사람들은 더 빨리 새로운 것으로 바꾸고 싶어한다.

나도 크게 다르지 않다. 원래 호기심이 많아 같은 장소를 두 번 이상 잘 가지 않았다. 단골인 한 두 식당만 정해놓고 먹는 사람과는 달리 계속해서 새로운 곳을 찾아보는 타입이었다. 그런데 그 중 어떤 곳들은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겨 근방에 갔을 때 그 장소부터 떠오르거나 혹은 일부러 다시 찾아가게 만드는 것이었다. 잠깐의 유행을 선도하는 발랄함이 아닌 묵직한 내공이랄까. 메뉴도, 공간의 분위기도 모두 훌륭한 곳들. 지식과 기술, 철학과 개성을 함께 갖춘 곳들. 이 단발성의 시대에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키며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곳들은 그 자체로 고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밀로커피에 오게 된 것이 바로 그런 수순이었다. 커피도 마들렌도 분위기도 너무나 꽉 차고 오래된 안정감을 주어서 마치 비엔나의 100년 된 커피하우스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마침 음악도 잔잔하게 모짜르트 협주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안에서는 코로나도 시간의 흐름도 느껴지지 않았다. 언제 찾아와도 같은 모습으로, 앞으로 10년 후에도 그대로 있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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