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7월 1일, 나는 처음 영국 땅을 밟았다. 청바지 네 벌과 티셔츠 네 벌, 그리고 여행용 캐리어 하나가 전부였다. 서른셋. 한국에서의 직장과 집을 뒤로한 채, 영어도 제대로 못 하는 상태로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다. 여름밤의 소나기는 거세게 쏟아졌고, 밤이 되자 기온은 뚝 떨어졌다.
연착된 엑시터행 버스를 기다리며, 캐리어 속에 넣어두었던 겨울 외투를 꺼내 걸쳐 입었다.
그날 버스 안은 바깥 온도와 에어컨 바람이 만나 습기가 가득했고, 나는 습기 찬 유리창에 무언가를 적어 넣었다. 아마도 ‘자유’였던 것 같다.
9월부터 시작한 대학원 생활은 두려움의 연속이었다. 미국식 영어에 익숙했던 터라 영국식 영어는 낯설고 투박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교수의 정확한 발음이 오히려 배운 적 없는 외계어 같아서, 수업을 거의 따라갈 수 없었다. 사정을 설명하고 수업 녹음을 부탁하자, 교수님 앞에는 기자회견장처럼 녹음기 다섯 대가 줄지어 놓였다. 아마 나처럼 버거워하는 외국인 학생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누군가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다는 생각에 그들의 존재 자체가 위로가 되었다.
영국의 버스비는 비싸다 못해 사악했다. 비를 맞으며 한 시간씩 걸어 집에 가던 날도 있었다.
유학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왔지만 영어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사람들과의 관계는 늘 어색했다. 기숙사 난방이 꺼지는 새벽이면 어김없이 추위에 떨었다. 시간이 흘러도 익숙해지지 않는 영국에서, 버티는 법을 배웠다. 그땐 살아남는 것이 목표였다.
17년 차.
작은 성취감도, 몇 번의 좌절도 맛보았다. 학위를 마친 뒤 취업도 했고, 방 한 칸에서 시작해
작은 집을 얻고, 집을 사고 나중에는 집을 세주는 집주인이 되기까지 과정도 공유하고 싶다. 물론 화장실을 제외한 모든 공간은 ‘낫웨스트 은행 소유’다.
비바람 속에서 오들오들 떨며 걸었던 날들, 우산이 뒤집혀 몸이 흠뻑 젖었던 날들, 영어가 하나도 들리지 않아 그저 고개만 숙였던 날들. 그 시간들을 이젠 아프지 않게 꺼내 볼 수 있을 것 같다.
유학기나 여행기가 아니라 외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으로 겪고, 마음으로 느낀 경험,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조금씩 얻은 ‘나를 위로하는 방법’ 혹은 ‘나를 응원하는 방식’을 담은 기록이다. 청바지 네 벌과 티셔츠 네 벌로 시작한 여정이, 이제는 나를 만들고, 내 집과 내 일, 내 삶의 이야기가 되었다. 영국 왕실 이야기, 비자, 영주권 신청하기, 음식, 직장 구하기, 집 구하기 등 영국에서 살아온 내 삶의 풍경들을 이제 글로 옮기려 한다. 외국인으로서 외로움에 부딪히며 살아온 날들을 기록하고, 공유하고, 함께 떠올리고 싶다. 이 이야기를 읽는 이들이 영국이라는 나라를 조금 더 가깝게 느끼고, 동시에 누군가의 도전과 버티기에 공감할 수 있기를 바란다.
왜 하필 영국이었을까?
퀸의 음악에 매료되어서라고 말할 수도 있고, BBC 드라마 <오만과 편견> 속 콜린 퍼스를 보고 싶어서였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제인 오스틴이나 셰익스피어 같은 작가를 동경해서 일 수도 있다.
요즘은 K-POP이 세계를 흔들고 있어 나와 같은 마음으로 한국에서 사는 외국인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 모두를 마음 깊이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