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관에도 휴가가 필요해요
시험관 8차, 이번에도 실패다. 남편에게 결과를 전했다. 표정 변화가 없다. 이제 실망도 안 한다. 기대도 안 하는구나, 이제. 그의 시선은 다시 휴대폰. 하와이 호텔 사진이었다. 몇 달 전부터 현실 도피의 수단인지, 남편은 하와이 사진만 보고 있다. 그런 그를 볼 때마다 생각했다. ‘우리 남편 철들어야 하는데.’, ‘시험관에 들어가는 비용이 얼만데 이 와중에 여행을 가? 심지어 하와이에?‘, ’ 우리가 지금 여행이나 다닐 때야?‘
지나고 보니, 꼭 인생에서 여행을 가야 할 시기가 있었다면 바로 그때였다.
즉흥적으로 결정했다. 이번 여행은 남편을 위해 가보자고 생각했다. 그의 우울한 얼굴을 매일 보는 일도 힘들었으니까. 우린 신혼여행을 안 갔었잖아,라고 합리화를 하며 적금을 깼다. 비행기표만 예약했는데도 남편의 웃는 얼굴을 봤다. 난임 생활 전에나 볼 수 있었던 그 미소를 보며 여행을 시작했다.
이름도 경쾌한 호놀룰루에 도착하고 아직 공항이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그 마음이 찾아왔다. 내 세계가 넓어지는 기분. 처음 가보는 도시에 갔을 때, 안 해봤던 것을 시도했을 때 느껴지는 그 감정말이다. 알게 되었다. 난임생활을 하면서 내 세계를 쪼그라지게 만들었다는 것을. 이름에 ’ 룰루‘라는 말이 들어가는 도시의 공기를 가득 들이쉬었다.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직사광선을 받으며, 눌려있던 내 세계가 펴지는 경험을 했다.
남편은 매일 아침 웃으며 일어났다. 바로 수영복을 입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배고프면 무스비와 맥주로 점심을 때우고, 5달러짜리 스노클링 장비를 챙겨 다시 바다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늘보다 바닷속을 더 오래 봤다. 이 정도면 아는 물고기가 생기는 거 아니냐고 농담을 주고받았다. 무스비를 사러 편의점에 걸어가다가 문득 깨달았다. 내가 하와이에 놀러 온 이유를. 하와이를 구경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남편이 웃는 모습을 보러 온 것이었다. 평소에 못 보던 그 장면. 그리웠던 그 장면. 사랑하는 사람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 이곳까지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실크같이 부드러운 바람이 종일 불었다. 한낮에는 피하고 싶은 해였지만, 그늘에서 보고 있자면 햇살이 너무도 천진해서 같이 놀자고 하는 것 같았다. 지난주 오늘 나는 8차 실패 후 칙칙했던 모습이었는데, 반바지에 민소매를 입고 실크 바람을 맞고 있자니 그 대비가 확연했다. 세상은 반짝거리는 곳이었구나, 이런 곳에서 나 혼자 방에 틀어박혀 울고 있었구나.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어라, 나만 이렇게 다 놓치고 살고 있었어? 앞으로 더 세상을 구경하자고 다짐했다. 내가 만든 우울에 빠지지 말고 반짝이는 세상을 더 구경하자고.
여행지에서 일주일간 난임생활에 대해 걱정할 시간이 없었다. 어떤 시간을 쪼개서, 어떤 적금을 깨서 온 여행인데 하며 시간표를 더 빡빡하게 짰다. 지나고 보니 그 시간표가 생각할 시간을 줄여주었다. 이것만으로도 디톡스랄까, 정화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관성에서 벗어나는 시간. 난임생활에도 필요하다.
그리하여 여행이 끝날 때마다 나는 같은 사람인 채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온다.
_ 한수희, <여행이라는 참 이상한 일>
분명 같은 사람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삶에 대한 입맛이 다시 생겼다. 가기 전에 내 마음은, 내 인생에 더 이상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삶을 기대할 필요가 있을까, 입을 삐쭉거리다 자주 울었다. 분명 임신만 실패인 것인데, 내 인생이 실패한 기분이었다. 그 비이성적인 마음을 환기하고 돌아왔다. 삶에 대한 입맛이 뚝 떨었졌었는데, 숟가락 들고 좀 먹어볼까 하는 삶에 대한 기대가 돌아왔다.
현재 자신의 인생과 전혀 다른 삶을 상상해 보는 것. 저는 여행에서 느끼는 묘미가 그런 상상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_ 미야노 마키로, 이소노 마호,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
일주일간 하와이에서 우리가 난임부부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살았겠구나, 다른 삶을 경험하고 돌아왔다. 그 경험 덕분에 조금 더 도전해 보자는 힘이 생겼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
1. 시험관에도 휴가가 필요해. 잠깐 쉬어도 괜찮아. 아니, 쉬는 것이 필요해.
2. 세상은 반짝반짝 빛나. 세상에 나가 그 빛을 봐. 병원만 다니면 그걸 잊게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