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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6월의 밑줄(1/3)

인생의 모든 답을 책에서 찾는 중

by 카후나

06월 09일 월요일 기록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는 무엇이든 해보라고 격려해 주는 손길 같다. 눈부시게 자라난 올해의 신록과 활동량이 부쩍 늘어난 사람들 틈에서 나 역시 1년 중 가장 씩씩해져서 이맘때를 보낸다. 바깥으로 나갔다가 돌아올 적마다, 책의 귀퉁이를 접듯이 오늘 같은 날을 접어주고 싶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_ 김신지, <제철행복>, 136쪽


(요즘 긴 한 문장 쓰기 챌린지 중이라는 것을 미리 밝히며)


지난주 토요일 외할머니 94번째 생신을 축하하러 전주에 다녀왔는데, 엄마가 기차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벌써 보리가 다 자랐네, 어머 모를 심은 논도 있네, 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며 지금 내가 사는 절기가 망종이라는 것을 떠올리자마자,


요즘 다이어트를 한다면서도 야외에서 마시는 맥주를 참을 수 없어 지난주에도 두 잔이나 마신 나를 용서하게 되었으며(제철 행복을 참지 못한 거였네), 곧 들이닥칠 장마의 꿉꿉함과 모기 녀석들, 에어컨 바람의 공격 전에 더 밖에 나가 놀아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당장 <제철 행복>의 '망종' 부분을 읽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는데, 잊고 있다가 월요일 아침이 되서야 창문을 다 열고 초여름 바람을 맞으며 책상에 앉아 이 문장에 밑줄을 치고 있자니, 나도 이 순간을 접어두고 싶어 이 문장을 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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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월 10일 화요일 기록


돈이 될 수도 없고, 영예를 안겨주지도 않으며, 당장은 업적이 될 수도 없는 일에 턱없이 진지하게 매달려 있는 사람들

_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41쪽


요즘 푹 빠진 황현산의 글을 읽다가 이 문장에 밑줄을 치며, 내가 바로 이런 사람인 것 같다고 생각하며 자기객관화 모먼트를 가졌는데,


선생의 글이 대체로 이런 식인 게 - 어려운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요지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직관적인 문장을 따라 읽다 보면, 깨달음이 생겨 먼 산을 보게 되고,


등을 세게 한 대 맞은 것 같은 가르침을 주는 은유 샘의 글과는 다르게 황 샘의 글은 분명 때리지 않은 것 같은데 크게 멍이 든 느낌으로 배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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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월 11일 수요일 기록


몸을 단번에 일으키고 커튼을 걷으면 아, 눈이 거기 있다. 창을 내내 올려 보다가 내 얼굴이 뜨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손바닥을 힘차게 흔드는 애인처럼. 눈을 그렇게 발견하는 날은 사랑을 발견한 듯 벅차다.

_ 한정원, <시와 산책>, 11쪽


모기 한 마리 때문에 새벽 3시에 잠에서 깼지만, 보너스로 얻은 시간에 새벽에 책을 보다가 이 문장에 마음을 빼앗겨 적으며,


내가 궁금한 것은 뉴스에서 다음 주면 장마라고 하고, 최고 기온이 28도까지 오르는 망종과 하지 사이인 초여름에 대체 무슨 이유로 이 문장이 내 몸에 감기는 걸까 싶고, 초여름에 첫눈을 보고 싶은 이 마음은 어디서 왔는지인데,


그러고 보면 나는 어릴 적부터 곁에 있는 것들을 소중하게 여기지 못하고 멀리 있는 것들만 눈 반짝이며 동경하는 사람이지 않았나 싶어, 이 정도면 본성이 어리석은 게 아닌지까지 의심이 드는 아침이지만,


이 문장은 외우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고, 나도 이만큼 멋드러지게 부사를 사용한 문장을 한 문장이라도 쓰고 죽고 싶은 바람을 가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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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월 12일 목요일 기록


나는 내가 품고 있던 때로는 막연하고 때로는 구체적인 생각들을 더듬어내어, 합당한 언어와 정직한 수사법으로 그것이 가능하다면 아름답게 표현하고 싶었다. 그 생각들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_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4쪽


나만의 것을 모두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이 글쓰기라는 문장을 읽은 뒤로(김정선, <열 문장 쓰는 법>), 나만의 것은 뭘까라는 질문이 마음속을 떠나지 않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나만의’ 에피소드나 특수한 경험, 여행 같은 비일상적인 소재보다 ’나만의‘ 하루를 사는 내 마음, ’나만의‘ 몸의 감각, ’나만의‘ 기쁨이나 슬픔이 진짜 나만의 것이라고 느끼지만,


정작 다음 주 목요일 글쓰기 모임에서 발표할 A4 두 페이지 분량의 글의 소재는 수영 대회에 나갔던 일이나 히말라야 여행 갔던 일 밖에 떠오르지 않고,


문장 메모 리추얼 회고 모임에서 여주님이 유진목 시인에게 들은 말(에피소드 말고 오로지 내면만 써보세요)라는 말이 마음에 계속 남아서 나도 특별한 일이 아닌 ‘나만의‘ 이야기를 글로 쓰고 싶지만, 도대체 뭘 써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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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월 13일 금요일 기록


어쩌면 몸은 답으로 끝나지 않는 유일한 질문이리라.

_ 오션 브엉, 이민자의 하이분 중에서


유산소 운동은 2-3시간도 혼자 즐겁게 할 수 있는데, 근육 운동은 영 혼자 못해서 PT만 가끔 받다가, 에라이 언제까지 이렇게 남에게 의지하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싶은 마음이 올라와, 어제 약 2년 만에 혼자 체육관에 가서 쇠질을 하고 왔는데, 아침에 일어나 다리에 근육통이 느껴지니 돈 안 들이고 얻은 통증이 어찌나 반가운지 공돈이 생긴 것처럼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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