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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8월의 밑줄(3/3)

<안녕 주정뱅이>, <상황과 이야기>를 읽으며 진하게 친 밑줄들은 바로.

by 카후나

08월 18일 월요일 기록


갑자기 뭔가 중단되었을 때에야 그것의 지속을 얼마나 갈망해왔는지 알게 되듯, 훈은 잘린 시간의 단애 앞에서 화들짝한 분노와 무력한 애잔함에 사로잡혔다.

_권여선, 단편 <삼인행>, <안녕 주정뱅이>, 53쪽


이럴 때 있죠? 내가 그걸 바라고 있었구나, 하고 내 마음을 그것이 중단된 후에야 알게 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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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월 19일 화요일 기록


삶에서 취소할 수 있는 건 단 한가지도 없다. 지나가는 말이든 무심코 한 행동이든, 일단 튀어나온 이상 돌처럼 단단한 필연이 된다.

_ 권여선, 단편 <카메라> 중, <안녕 주정뱅이>, 136쪽


오랜만에 애를 재우다 잠들지 않았어요. 창밖에서 매미와 풀벌레가 번갈아 가며 우는소리를 들으며, 거실 식탁 등을 켜고 권여선 단편을 읽는 이 시간이 올여름 중 가장 달콤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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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월 20일 수요일 기록


작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그 일을 큰틀에서 이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_ 비비언 고닉, <상황과 이야기>, 107p


그래도 일기라도 쓰면 큰틀에서 볼 수 있는 것 같다. 적어도 쓰는 나와 쓰여지는 나로 구분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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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월 21일 목요일 기록


저는 이런 우연한 조우, 스치듯 지나가는 길 위에서의 인연을 무척 좋아합니다. 지나가는 여인에게 연정을 느낀 보들레르처럼 말이죠.

_ 권여선, <안녕 주정뱅이>, 159쪽


엄마가 되고 크게 변한 게 있다. 안전에 대해 너무 민감해졌다. 무탈한 일상에 비로소 감사하며 산다는 좋은 점도 있지만, 위험을 감수하려고 하지 않아서, 이렇게만 살다가는 내가 팍 낡아버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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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월 22일 금요일 기록


차라리 다리라면 어땠을까요? 이렇게 되고 보면 신체의 위계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_ 권여선, <안녕 주정뱅이>, 164쪽


24개월 딸의 오른팔 팔꿈치 아래 뼈 두 개가 부러진 건 지난달 말일이었다. 그날부터 매주 소아 정형외과에 가고, 병원에 갈 때마다 놀란다. 길 가다 팔이나 다리가 부러진 아이 한 명만 봐도 아이도, 부모도 딱하다는 마음으로 가슴이 철렁하는데, 진료실 앞에는 늘 스무 명 정도 되는 아이들이 기브스를 하고 앉아 있다. 어떤 아이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양 다리가 부러졌다. 다리 전체에 석고 깁스를 하고 휠체어를 밀고 나오는데, 울상이 된 엄마 표정과 상반되게 아이는 정작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아이들의 마음 회복력이란! 또 딸과 또래로 보이는 다른 아이도 오른 다리 전체에 깁스를 했는데, 그걸 보며 내가 느낀 감정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우리 딸, 팔을 다쳐서 망정이지, 다리를 다쳤으면 정말 힘들었을 거야. 다행이지 뭐야. 나는 왜 고통을 비교하는가, 나는 왜 이렇게 못났는가! 내가 싫어지지 않는 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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