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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후나 Jun 06. 2023

5월의 밑줄(2/3)

인생의 모든 답을 책에서

05월 15일 월요일

우리 단단함에 대해 적을 것이 아니라

하염없이 무너지도록

힘쓸 일이 없도록


아침에는 토마토를 구워요

당신을 당신 바깥으로 놓아보아요

_ 이규리, <정말 부드럽다는 건> 부분, <당신은 첫눈인가요>


아침마다 종합비타민, 유산균, 비타민 D를 챙깁니다. 그리고 시도 한 편씩 물과 함께 삼킵니다. 시를 읽으면 굳이 이해가 되지 않아도 어쩐지 기분이 좋더군요. 고요한 새벽에 시를 필사하는 것이 뭔가 낭만적이라 그런가, 아니면 내가 평생 절대 안 할 것 같은 일이라 뭔가 한계를 벗어나는 느낌이 들어서 그런가, 일어나자마자 처음 하는 일이 쓸모가 있는 일이 아니라 하등 쓸모없는 무용한 일을 하는 일탈적 느낌인가, 여러 날 고민해 보았습니다.


오늘 아침 <정말 부드럽다는 건> 이 시가 저에게 답 해주더군요. 너 말이야 부드러워지고 싶어서 시를 읽는 거야. 이 시에서 말하는 아침에 토마토를 굽는 일이 저에게는 시를 읽는 일인 것 같아요. 구울수록 눈물이 많아지고, 오래전 잊고 있던 마음이 생각나고, 제 안의 독소가 빠지니까요.


같은 시를 읽어도 사람마다 전혀 다른 이미지가 떠오르고 다른 말로 들리는 것이 신기해요. 같은 시를 메이트님들은 어떻게 읽을지도 궁금하고요. 우리 단단하기만 하지 말고 조금 부드럽게 물러져서, 더 많은 것을 느끼고 우리를 우리 바깥으로 놓아보기도 할 수 있는 날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부드러운 한 주 보내세요.


05월 16일 화요일


장기적인 회복에 성공한 나의 모든 환자는 정신적, 육체적 건강유지의 핵심요소로서 ‘있는 그대로 말하기’에 힘쓰고 있다.

_ 애나 렘키, <도파민네이션>, 209p


솔직하다는 것은 건강한 마음에서 나오지... 이 상식적인 인식을 이 책에서 다시 만났다. 저자는 중독에 빠진 (또는 회복하고 있는 마음이 아픈) 환자들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자신의 나약함을 솔직하게 마주할 수가 없다고 했다. 평소 본인의 말은 다 맞고 언제나 정답이라고 하던 몇 분의 얼굴도 이 문장 뒤로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얼마나 솔직한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남에게는 그렇다고 해도, 나 스스로는 얼마나 있는 그대로 내 나약함을 인정하고 있는지. 장점은 장점대로 인정하는지(이게 진짜 어려운 일). 그런 마음으로 일기며 모닝페이지를 읽어보는데, 역시 꾸밈이 기름기처럼 전체적으로 끼어있다. 제발 스스로에게만큼은 더 솔직해지고 싶다. 더 있는 그대로 말하고 싶다.


05월 17일 수요일


자네는 이 폐쇄된 공간에서 이른바 세상이라는 곳으로 나가는 날을 고대하고 있나?

_ 존 윔리암스, <스토너>, 28p


개발하고 있는 웹 서비스가 조금씩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림으로만 존재했던 페이지에 심장이 생기고, 뼈가 생기고, 표정도 생기고 있습니다. 그 말은 이 서비스가 이른바 세상이라는 곳으로 나가는 날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말이네요. 그런데 이 문장이 저에게 질문을 해요. 너... 세상이라는 곳으로 나가는 그날을 고대하고 있나? 마음속에서 바로 들린 답은: 아니요, 덜덜 떨리는데요.


이제 무서워도 되돌아갈 수도, 멈출 수도 없긴 합니다. 그것이 무섭기도 하면서 어쩐지 안도감을 주기도 하네요. 희희님의 말처럼 ‘어떻게든 되니 걱정말자.’, 효주님 말처럼 ‘의외로 괜찮을지도?’, 제 최전선 말인 ’아, 대충 해.‘를 총 동원해서 마음에 대비를 해봅니다. 두려움을 안고 세상에 나가는 날을요.


05월 18일 목요일


공부하(려)는 어른은 낡지 않는다. 몸이 늙어도 눈은 빛난다. 공부를 내려놓은 어른은 눈빛부터 굳는다.

_ 박연준, <고요한 포옹>, 97p


20대에 배운 것으로 30대를, 30대에 배운 것으로 지금 40대를 살고 있는 기분이 들어요. 자연스럽게 지금 공부하는 것으로 50대를 살겠지요? 무섭습니다. 요즘 무슨 공부하시나요? 저는 요즘 공부 안 하는 것 같아요. 지난달에 읽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2주 정도 가지고 다니며 표지가 계속 저에게 ‘공부’라는 단어를 보여줬어요. 볼 때마다 덜그덕 덜그덕 마음속에서 걸렸습니다. 그래서 아.. 내가 ‘공부’와 많이 멀어졌구나.. 알게 되었죠. 그런 차에 이 문장을 읽고는 내가 낡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화들짝 놀라), 사진첩을 열어 눈빛을 유심히 봤습니다. 뭐 역시 내가 나를 본다고 알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요.


학교 다닐 때 저는 시험을 잘 보는 공부 잘하는 학생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학교와 수업시간을 좋아하는 노력파였죠. 모르는 것을 알게 될 때의 그 짜릿함, 어제까지는 몰랐던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저 깊은 곳에서부터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쾌감을 가슴에 벅차게 안고 신발 가방을 흔들며 하교하던 길이 생각나네요. 공부하기를 좋아했던 그 어린이를 다시 만나고 싶어요. 새 친구도 잘 사귀고 (호기심으로), 새로운 경험도 곧잘 했던 내가 내 안에 분명 조금은 남아있을 것 같아요.


05월 19일 금요일


가장 좋은 건 언제나 우연히 왔다.

_박연준, <고요한 포옹>, 85p


더 우연에 기대볼래요. 이 문장은 정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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