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던 집 시리즈 스물두 번째 집
한 달 모자란 10년을 살았던 집, 지금도 여전히 우리 집 하면 떠오르는 대화동 농가주택의 진짜 주인이 어느 날, 집을 비워달라고 했다. 집안을 전체적으로 리모델링하고 주인아저씨의 자녀가 들어와 살 예정이라고 했을 때, 나는 기어코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뿐이지라고 생각은 했으나 마음은 말할 수 없이 회오리쳤다. 우리가 사는 동안,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무 마루의 코팅은 벗겨졌고, 화장실 앞 쪽의 바닥은 색이 변했다. 벽지도 바랬고, 햇빛과 빗물을 직접 받았던 나무 데크의 이곳저곳이 썩어갈 때에. 그저 임시방편으로 보수하며 살아왔었다. 어린이였던 아이들이 청소년기를 지나 차례로 성인이 되어갈 때에 이 집과의 이별도 함께 오고 있다는 생각도 준비도 하지 않고 있었다.
세상에서 뚝 떨어진 섬 같은 곳에서 그런 우리를 찾아온 아주 아주 많은 손님들을 맞았던 집, 아이들과 더불어 결코 잊을 수 없는 시절을 보냈던 우리 집을 떠날 준비를 시작하고 나서야, 십 년 가까이 묶여 있던 우리의 전세금으로는 이제 신도시 안에서는 우리 여섯 식구에게 마땅한 집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일산의 외곽으로 눈을 돌렸다. 옛 집에서 차로 20분 정도의 거리에 있어 서울을 오가기에는 교통편이 더 나빠지자 첫째와 둘째의 입에서 학교 근처로 자취를 해야겠다는 말이 처음으로 나왔다. 바람이 유난히 드세다는 풍동을 찾았다.
3층 건물의 1층은 비어있었다. 간판이 붙어있던 곳의 자국이 희미하게 교회였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2층에는 이미 두 가구가 살고 있었고, 우리가 둘러볼 곳은 대부분 집주인이 산다는 3층이다.
301호에 들어서자 휑하다 싶을 정도의 넓은 거실이 나왔고 그 한쪽 면은 대리석으로 시공되어 있었다. 방은 두 개뿐이라고 했다. 아주 긴 일자 부엌이 거실 중앙의 커다란 창과 마주한 모양으로, 그 사이의 거실 공간은 어린애들이 공놀이를 해도 될 만큼 넓었다. 천정은 여러 층의 목재를 사용하여 직선과 곡선의 디자인을 넣어 입체적이고 화려하게 꾸몄고, 여기저기에 조명이 많았고, 중앙에는 화려한 샹들리에가 달려있었다. 건물주 본인이 살 작정으로 정성 들인 흔적이 가득한 집이었다. 안방은 정말 깊숙이 집의 안쪽에 있고, 작은 방은 바로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있으니 거실을 사이에 두고 최장거리에 두 개의 방이 있는 셈이다. 안방을 먼저 보았는데 문득 티브이에서 본 룸쌀롱이 생각났다. 침대머리가 맞닿은 벽면의 청색 천 벽지에는 금색 반짝이가 현악기 곡선처럼 세로로 차곡히 새겨있었고, 가장자리는 마치 커다란 액자처럼 목공으로 프레임을 둘렀다. 방에서 붙박이 벽장을 지나 화장실 쪽으로 향한 통로에는 문짝 없이 아치형으로 뚫어 놓았다. 미색의 벽과 천장은 전등을 켜면 은색 반짝이 벽지가 방향에 따라 살짝씩 빛났다. 안방 역시 상당히 공들인 인테리어였다. 그러나 현관문 바로 옆의 붙박이 장과 작은 창이 있는 작은 방은 정말 작았다. 안으로 들어가 창문을 열어보니 바로 옆집 외벽이 손에 닿을 듯 가까웠다. 창을 열어도 답답했다. 이 집에서 가장 돋보였던 것은 거실 큰 창 밖 모습이었다. 아담한 공원과 알록달록 어린이 놀이터 안에서 놀고 있는 꼬마들 모습이 정말 예뻤다. 집을 보여주던 사람은 이곳이 정남향이라 볕이 하루 종일 들어온다며 겨울에도 난방비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고 힘주어 말했는데 살아보니 그렇지는 않았다. 그저 춥지 않을 정도로만 살았다.
당시 큰 아들은 군복무 중이었지만 딸아이, 막내아들과 함께 네 명은, 기본이고 친정엄마도 한 동안씩 계셔야 하니 방이 두 개인 것이 난감했다. 그러나 마땅히 다른 집을 찾지 못한 우리는 둘러앉아 지혜를 모았다. 대화동 집 널찍한 공부방을 가득 채웠던 키 큰 책장 열두 개를 벽 삼아 거실 한편에 작은 방을 꾸미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책장으로 만든 벽을 세워 방을 만들고도 티브이와 피아노를 놓을 공간과 침대로 사용할 수 있는 길고 단단한 소파를 두었다. 널찍한 크기로 우리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이상한 거실이 그럴싸해졌다.
풍동집에서의 2년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대화동에서는 동네에서 우리 집 아이들이 제일 어렸고 한낮에도 아니 하루 종일 조용하기만 했는데 이곳은 달랐다. 점심시간마다 근처 어린이집에서 잠시 풀려나 놀이터와 공원에서 소리치며 뛰노는 어린애들의 웃음소리가 싱그럽고 정겨웠다. 집에서 3분 안에 마을 버스정류장이 있고, 골목을 나와 10분만 걸으면 보이는 광역버스 정류장 옆으로, 장을 볼 수 있는 왁자지껄한 시장이 나타났다. 나는 이 낯선 생동감이 마음에 들었다. 잠들기 전 남편과 나란히 누워 화려한 조명을 차례로 소등할 때 건물주의 취향을 얘기하면서 웃은 적이 있다. 특히 철 지난 영화 속 룸쌀롱과 모텔 같은 침실의 오묘한 분위기는 우리가 다시 이삿짐을 쌀 때까지도 잘 적응이 되지 않았다.
풍동집에 살 때에 큰 아이는 군복무를 마쳤고, 둘째는 바빴다. 복학한 첫째와 활동이 많아진 둘째가 대학 근처에서 함께 자취를 시작했다. 집에서 신촌까지 광역버스로 한 번에 통학이 가능한 막내만 남아 작은 방을 사용하게 되니, 거실에 급조했던 방은 일 년을 넘기지 못하고 해체되었고, 벽으로 삼았던 책장은 확 줄인 책들을 안고 거실 한쪽 끝으로 밀려났다. 대화동 살 때까지만 해도 대부분 우리 집에 계시면서 딸과 함께 방을 쓰시던 엄마는 우리가 이사하고 방이 줄어들고부터는 두 동생네 집에 더 많이 더 오래 머물다 오시는 일이 많았다. 엄마의 소지품과 옷가지들이 세 딸네 집에 고루고루 나뉘었다.
햇살이 그렇게 좋은데도 습도가 높은 이상한 집이었다. 붙박이 장 안의 옷들에 곰팡이가 피었다. 셋째의 입시가 끝나자 내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병명도 생소한 ‘메니에르 증후군’이다. 세상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이 희귀한 병의 증상은 온 세상이 선풍기가 도는 듯 빙글빙글 도는 것이다. 말로 할 수 없이 괴로운 이 메니에르의 조짐은 처음에 등과 목이 아프면서 시작되었다. 잠을 설치게 되고 몸이 피곤해지더니 어느 날 한쪽 귀의 청력이 떨어지면서 이명이 크게 들리고, 귀에 물이 차오르는 듯한 느낌이 올라오더니 갑자기 세상이 돌아갔다. 처음에는 1, 2분 안에 사라지던 회전이 점점 강도도 세져지며 한 시간을 넘겼다. 그 시간을 견디는 동안 서 있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요, 앉아 있을 수도 없는 처참한 상태가 되며 연신 구토가 나왔다. 대학병원의 약도 소용없었다. 운전은 꿈도 못 꾸고 외출을 아예 삼가고 증상이 잦아드는 틈을 타서 음식을 겨우 먹었다. 등과 목에 마사지를 하며 몸을 편하게 했다.
풍동집과 그다음 집을 걸쳐 종종 다시 증상이 나타났지만 횟수가 줄어들었다. 몸 상태가 괜찮아지면 산책을 했다. 몸과 마음이 안정을 되찾아 가기 시작했다. 이제 증상이 나타나지 않은지 여러 해가 지났다. 메니에르 병은 완치가 없다고 했다. 다시 아프지 않도록 과로하지 않고 내 몸의 소리에 더 귀 귀우리며 살고 있다.
대화동을 떠나고 찾은 첫 번째 집 풍동에서는 오래 살지 못했다. 2층에 살던 세입자가 건물을 샀다. 새 주인은 가능하면 빨리 우리가 살고 있는 꼭대기층 301호에 들어오고 싶다고 말했다. 법적으로는 계약 만기일까지 우리가 버틸 수 있었지만, 얼굴을 찌푸리며 같은 계단에서 마주치는 것은 싫었다. 처음으로 세입자여서 서러웠다. 그러던 중에 나라에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모두에게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딸아이와 둘이서 안산을 다녀오고 함께 팽목항을 찾았다. 이후 정부에서 대처하는 일련의 행태에 아이들은 깃발을 들고, 종로로 광화문으로 나가 구호를 외치며 걸었다. 건강을 지켜야 하는 나는 군중 속에 내 아이들을 TV로 보며 슬퍼했다.
풍동에서의 기억은 꼬마들의 웃음소리와 환한 햇살만 남기고 싶다. 온몸의 이곳저곳과 마음까지 많이 아파서 힘든 날들이 쌓였던 곳,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애쓰며 살았던 씁쓸한 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