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던 집 시리즈 스물두 번째 집
한 달 모자란 10년을 살았던 집, 정말 우리 집 같았던 대화동 농가주택의 진짜 주인이 집을 비워달라고 했다. 어린이였던 아이들이 차례로 대학생이 되어갈 때, 언제일까 싶던 이 집과 이별하는 시간이 함께 오고 있었다. 잊을 수 없는 시절을 보낸 대화동은 이제 서울의 학교로 통학하기에 힘이 드는 동네가 되었고, 우리는 순순히 집 떠날 준비를 했다.
옛 집에서 차로 20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풍동의 신축빌라를 소개받았다. 작은 교회가 임대했었다는 1층은 비어있었고, 2층에는 두 가구가 살고 있었다. 매물로 나온 집은 보통 집주인이 산다는 3층이었다.
내부가 평범치 않았다. 아파트 평수로 족히 40평은 훨씬 넘어 보이는데, 한쪽 벽면은 미색 대리석, 방이 달랑 두 개인데 욕실도 둘, 길게 뻗은 일자 부엌이 널찍한 거실 창과 마주 보고 있는 그 사이의 거실 공간은 어린애들이 공놀이를 해도 좋을 만큼 넓었다. 거실 천정은 여러 층의 목재를 사용하여 직선과 곡선의 디자인을 넣어 입체적이고 화려하게 장식했고, 조명 또한 샹드레아를 포함해 다양하게 설치되었다. 건물주 본인이 살 요량으로 작정하고 정성 들인 흔적이 보였다. 작은 방은 바로 현관 옆에, 안방은 깊숙이 들어앉아 거실을 사이에 두고 최장거리에 두 방이 있다. 안방을 둘러보는데 문득 티브이에서 본 룸쌀롱이 생각났다. 침대의 헤드와 맞닿은 한쪽 벽면의 푸른빛 천 위로는 금색 반짝이로 현악기의 곡선이 연상되는 문양들이 세로로 새겨있었고, 그 가장자리는 마치 커다란 액자처럼 목공으로 프래임을 둘렀다. 방에서 화장실을 향하는 문은 아치형, 벽과 천정은 미색이었지만 전등을 켜면 박혀있는 은색 반짝이가 살짝씩 빛났다. 안방 역시 상당히 공을 들인 집주인 맞춤형 인테리어였다. 그러나 현관문 옆의 방은 긴 붙박이 장과 창문을 열면 보이는 옆집 외벽으로 답답한 그저 작은 방이었다.
자그마한 공원과 어린이 놀이터가 가득히 담아지는 넓은 거실 창 밖의 모습은 정말 예뻤다. 정남향이라 겨울에도 평수에 비해 난방비가 들지 않는다고 했는데 살아보니 그렇지는 않았다.
당시 큰 아들은 군복무 중이었지만 딸아이, 막내아들과 함께 넷이 살아야 하므로 방이 두 개인 것이 난감했으나 마땅한 다른 집을 찾지 못한 우리는 둘러앉아 지혜를 모았다. 대화동 집 널찍한 공부방을 가득 채웠던 키 큰 책장 열두 개를 벽 삼아 거실 한편에 작은 방을 꾸미면 어떨까 아이디어가 나왔다. 책장벽 간이 방을 만들고도 소파와 티브이와 피아노를 배치한 거실 공간이 그럴싸하게 나왔다.
그렇게 풍동집에서의 2년이 시작되었다. 늘 조용하던 대화동 집의 한 낮과는 달리, 어린이 집에서 잠시 풀려나 공원에서 소리치며 뛰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싱그럽고 정겨웠다 집에서 3분 만에 버스 정류장이 있고, 골목을 나와 10분만 걸으면 장을 볼 수 있는 이 새로운 동네의 낯선 생동감이 너무 좋았다. 잠들기 전 남편과 나란히 누워 화려한 조명을 차례로 소등할 때 종종 건물주의 취향을 논하면서 웃었다. 그러나 철 지난 영화 속 룸쌀롱과 모텔 같은 오묘한 분위기는 다시 이삿짐을 쌀 때까지도 잘 적응이 되지 않았다.
우리가 풍동집에 살 때, 큰 아이는 군복무를 마쳤고, 둘째는 바빴다. 음악원 학생회장을 하더니 다음 해에는 총학생회장이 되었다. 복학한 첫째와 활동이 많아진 둘째가 대학 근처 이문동에서 함께 자취를 시작했다. 신촌까지 광역버스 한 번으로 통학이 가능한 막내만 남아 작은 방을 차지하니, 거실 한쪽의 임시 방은 일 년을 넘기지 못하고 해체되었고, 벽 삼았던 책장은 확 줄인 책들을 안고 거실 한쪽 끝으로 밀려났다.
햇살이 그렇게 좋은데도 습도가 높은 이상한 집이었다. 그래서인지, 셋째 아이의 입시가 끝나자 내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병명도 생소한 메니에르 증후군이다. 나중에 시간을 내어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이 희귀 증상(온 세상이 빙글빙글 선풍기 돌듯 돌아가는)을 어떻게 마주하고 진정시켰는지 정리해보려고 한다. 감사하게도 증상을 잠재우고 잘 지낸 지 7년이 넘어간다.
풍동집에서는 오래 살지 못했다. 계약 갱신일이 오기 전에 집주인이 바뀌었고, 새 주인이 들어와 산다니 집을 비워야 했다. 세입자의 서러움을 실감했다. 또한 이곳에서 세월호 참사를 마주했다. 온 가족이 고통스러워했다. 딸아이와 둘이서 안산을 다녀오고 함께 팽목항을 찾았다. 참사 이후 일련의 행태에 아이들은 깃발을 들고, 종로로 광화문으로 나갔고 구호를 외치며 거리를 걸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티브이로 보며 슬퍼했다.
풍동에서의 기억은 꼬마들의 웃음소리와 환한 햇살만 남기고 싶다. 온몸의 이곳저곳과 마음까지 많이 아파서 힘이 들었던,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애를 쓰다가 지쳐 떨어진 듯한 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