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던 집 시리즈 스물한 번째 집
9년 11개월 동안 살았던 집, 내 집이 아니라는 것을 잊고 살았던 집, 너무나 특별하고 그리운 대화동 집에 쌓인 이야기들은 수북한데 그 하루하루는 순서대로 생각나는 것이 아니어서 글로 남기는 것을 매번 머뭇댔다. 그러나 이사 다음날 첫 아침의 기억은 생생하다.
기쁘고 들뜬 마음을 달래며 겨우 잠들고 눈 뜬 그날 이른 아침은 윙윙대는 파리들이 깨웠다. 이 방 저 방에서도 같은 이유로 잠 깬 아이들이 거실로 나왔는데 모두들 잘 잤는지 웃고 있다. 처음으로 땅의 기운이라는 것을 느꼈다.
거실 창 밖 풍경은 그동안 집 주변을 서성이며 상상했던 그 이상이었다. 포도원 기둥을 감은 초록 넝쿨, 그것을 감고 올라온 활짝 핀 주황색 여름 꽃이 주렁주렁 달려있고, 땅에는 노란 수선화와 잔잔한 흰 꽃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엄마, 엄마, 우리 여행 온 것 같아. 여기서 계속 사는 것 맞아요?" 아이들이 말했다.
현관을 향해있는 나지막한 나무 계단을 지나 문을 열면 오른편으로 넉넉한 기역자 부엌이 맞은 편의 거실과 마주 보고 있고, 큼직한 유리창 밖 아래로 깔아놓은 자갈밭 한 두 평을 건너 꽃밭과 포도원이 펼쳐졌다. 거실 유리문과 밖으로 연결된 이 널찍한 나무 데크는 난간 없는 베란다 같아서 보통은 빨래를 널지만, 때때로 상을 펴고 함께 밥을 먹기도 했다.
집 뒤편으로는 멀찌감치 가좌마을의 윤곽이 보였고, 앞 쪽은 바로 우리가 살던 아파트단지여서 마을 버스정류장은 걸어서는 10분 안쪽, 자전거를 타면 수 분 안에 갈 수 있다. 집을 방문한 사람들마다 도심 속 이 시골집을 어떻게 찾았는지 궁금해하고 부러워했다.
셋집을 얻었을 뿐인데 마당과 텃밭과 꽃밭을 모두 사용할 수 있는 복을 받았다. 마당은 네댓 대 정도의 차가 주차할 만하고, 텃밭도 힘에 부칠만큼 밭농사를 지을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꽃밭과 포도원 뒤쪽 여나무그루의 아담한 복숭아나무는 이사 후 첫여름에 최고의 꿀 복숭아를 선물해 주더니 이후 맞은 열 번의 봄, 무릉도원 부럽지 않은 꽃 잔치도 열어주었다.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것 같은 일상 속에서 우리는 다른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과목을 커리큘럼에 넣지 않았고, 우리가 가르치고 싶은 것과 아이들이 배우고 싶은 것을 같이 공부하며 살았다. 일주일에 한 번 피아노 레슨은 이어갔다. 선생님이 집으로 오셔서 세 아이들을 각각 20 분씩 봐주셨다. 한 시간 수업은 가끔 또래의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동요를 함께 노래 부르며 지나갔다. 어느 날 선생님은 세 아이들과 친구 남매와 함께 동요집 CD를 만들어보자고 하셨고 우리는 선생님 지인의 스튜디오에서 친근하고 밝은 동요 몇 곡과 캐럴을 넣어 노래집을 만들었다. 훗날 오디오 서랍을 정리하다가 아이들의 CD를 찾았다. 꼬꼬마 시절의 내 아이들의 노래를 듣는데 웃음과 눈물이 같이 나왔다.
나와 남편은 모두 도시 사람이라 농사에 아는 바가 없었지만 '밭농사'라는 특별한 생산 활동을 시작할 때, 아이들과 함께 하는 살아있는 수업이 되도록 도와준 이가 있다. 우리를 신기하게 보는 이웃들 중 한 분인 옆집 할머니는 팔을 걷어 부치고 친히 농사 사부가 되어주셨다. 이 집에 사는 내내 감사했고 지금도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