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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mi Lee Feb 08. 2023

여행의 일상

집인가요



글서랍의 추억


브런치 글서랍에 그림 한 장이 가볍게 떠있다. 오래도록 서랍에 던져놓은 기념품을 꺼내드는 기분. 가볍게 그린 그림이지만, 이 한 장으로 다시 이야기는 이어진다. 브런치에 긴 글을 남겨보아야지, 여러 번 생각했지만 실행하지 못했다. 이번 서랍을 열었을 때는 한참 그 엽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쓴다. 서랍에 많은 기념품을 넣어 둬야겠다. 버리고 정리하더라도 말이다.



고흥, 겨우 1년


고흥 여행을 다녀왔었다. 오래된 기억 같은데, 노트에 적힌 날짜를 보니 겨우 1년 전이다. 하루하루는 빠르고, 언제 시간이 이만큼 흘렀나 생각한다. 숨 가쁘게 바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자꾸만 하는 것도 없으면서.. 그런 생각이 뒤 따른다. 내 일상이 그렇다. 엄마로 겨우 살고, 그러면서 성과랄 것이 없는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책을 읽는다. 무용의 용의 함에 대해 적은 많은 글을 읽지만, 여전히 마음이 들끓는 것은, 아직 더 살아야 한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럴 때마다 끝에는, 한번 더 오늘 할 일을 정리하고 우선순위를 정해 본다. 무엇으론가 내 일 년은 꽉 채워져 있었나 보다. 그래서 이렇게 22년 2월이 까마득한 옛날처럼 여겨지는 것이겠지.


전라남도 고흥. 한동안 다시 갈 일은 없겠다는 생각이 따라오는 먼 여행이었다. 그런 여행을 결심한 건 오직 나로호 때문이다. 나로호를 발사한 곳이 고흥이라는 말을 듣고, 그때부터 고흥앓이를 시작했다. 나로호 발사대에 가보고 싶었다. 친구는 ”과천과학관으로 충분하지 않니? “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확인도 스스로 보고 와서 생각해야 내 것이라는 듯 가고 싶었다. 실은 아이들보다 내가 더 가고 싶었다.


고흥은 크고, 아름답고, 멀다. 밤은 캄캄하고, 낙조가 멋졌다. 나는 고흥에서 아이들과 별을 봤고, 유자빵을 사 먹었다. 터미널과 읍내 근처가 아니면 편의점을 볼 수 없었다. 편의점 없는 풍경의 낯섦을 느꼈다. 이 자리에 앉아 생각하니, 고흥 길가에 편의점이 점점이 들어서는 날, 고흥이 가진 고요와 빛나는 별빛이 불빛으로 대체될 것이란 생각이 든다. 구불구불한 해안선, 무수히 많은 작은 섬들. 남쪽의 따뜻한 햇빛으로 기억한다.



어떤 여행이든


가볼 곳이 많고, 험준한 지형일수록 아이들에게서 눈을 뗄 수 없다. 고흥에서도 많은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2장이다. 한 장은 숙소에서 치맥을 먹으며 그린 그림, 그리고 한 장은 쑥섬에서 나오는 배를 기다리며 그렸다. 그림을 그려야만 내 여행이 완성되는 기분이다. 그리지 못한 여행은 적어도 나에게는 다 채워지지 않은 기억으로 남는다. 고흥의 많은 풍경이 그림 소재지만, 마음에 담아 올 수밖에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여행은 마음껏 그림 그릴 수 있는 여행인데, 그 마음껏은 충족하기 힘들다. 혼자 하는 여행이 아니기에 내 마음만 있을 수 없다. 남편의 마음은 내 마음이라 치더라도, 아이들 마음도 고려해야 한다. 함께한 여행에서 내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모두의 배려가 모여야 가능하다. 아이들이 자라며 상황이 좋아지기는 한다. 그림을 그리지 않는 사람과 여행할 때, 나는 좀 더 재빨라져야 하고, 그림을 시작할 타이밍을 잘 잡아야 한다. 자주 하지 않아서 그런지 여전히 어렵다. 누군가가 배려하는 상황에서, 같이 즐길 수 있는 방향으로 고민하고 있다.



저녁에는 리조트에서 1박 2일을 보며, 치맥을 먹었다. 가장 일상에 가까워졌을 때, 편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엄마는 어디 있어요?”

“이 손이 엄마손이야.”


손만 나온 엄마를 그려주겠다는 딸아이. 기대가 커진다. 나는 기꺼이 내 스케치북을 준다. 시간이 지날수록 모든 흔적이 더 소중해지니까. 이 살구색 덩어리는 뭘까? 얼굴이야?


“이상해서 x 했어요.”

“그냥 끝까지 그려보지 그랬어. 못 그린 게 아닌데. 너만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이야.”


이 그림을 다시 보니, 1년 사이에 아이 그림이 일취월장했다. 아이는 그저 자라기만 해도, 그림 실력이 쑥쑥 느는 경이로운 시기를 살고 있다.



그날 낮, 쑥섬 선착장에서 그린 그림이다. 쑥이 많이 나는 섬이라 이름이 쑥섬이라는 아주 작은 섬이다. 2월 말 남쪽은 이미 봄이 가득했다. 빨간 지붕 집과 쑥섬은 봄볕을 가득 품은 모습 그대로 기억에 저장했다.


여전히 미적거리며, 스케치북을 꺼낼까 말까 한참을 고민한다. 앉자마자 꺼내 그렸으면 충분히 완성했을 시간인데, 뒤늦게 그림을 시작해서, 다 그리지 못하고 왔다. 왜 나는 미적거리나 자책보다는 그래도 꺼냈으니까 좋다. 그냥 그게 나니까. 다만 다음엔 조금만 더 빨리 용기를 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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